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삶의 예술가 육코치 Jul 18. 2021

배고파, 밥 줘, 엄마

<맛있는 시>를 읽으며


겨우내 움츠려 있던 아해는 봄날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골목길 무리들 속에 합류합니다. 이병놀이를 하면서 온 천지 사방을 뛰어 다닙니다. 우리 편을 살려내지 못했다고 동네 언니에게 면박을 당합니다. 섧은데 표시도 못내고 있다가 풀이 죽어 털레털레 대문을 들어섭니다. 볼멘 소리로     


"배고파,밥 줘,엄마......"          


무와 소고기를 고추기름으로 빨갛게 볶아 끓여내는 소고기 무국에 빨갛게 양념 오른 부추 김치가 곁들여 나옵니다. 아해는 뜨겁고 매워서 땀을 흘리며 홀짝홀짝 후르륵 잘도 넘깁니다. 고봉으로 쌓아준 밥이 어느새 바닥을 드러냅니다. 그제서야 아해는 조불조불 일러바치며 꽁꽁 뭉쳤던 마음을 풀어냅니다. 엄마는 그저 잘 먹는 딸이 이뻐서 자리를 내내 지키고 앉아 가만히 얘기를 들어줍니다.    

      


평생 당신 살을 베어내어 먹인 딸에게 엄마는 딱 한 번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여러 병에 알츠 하이머 판정까지 받고 당신의 기억이 오래갈 수 없음을 감지한 엄마는 곡기를 끊다시피 했지요. 엄마의 마지막 주문을 이행하러 함께 들어간 베스킨 라빈스31. 엄마는 알록달록한 아이스크림을 망연히 한참을 들여다보셨지요. 바닐라와 호두 아이스크림을 용기의 바닥이 드러나도록 아무 말씀도 없이 드셨습니다. 작은 스푼을 내려놓으며 '맛있다' 야무지게 입매를 다지며 딱 한마디. 그러고보니 온전하게 엄마의 몫으로 먹었던 일이 있었던가 그제서야 아차 싶었습니다.     


'잘 크거라,나의 몸 나의 생     

죽는 일이 하나도 억울할 것 같지 않은     

시간이 맴돌이를 하는 어느 저녁 때다'     

- 황규관 <물은 제 길을 간다> 중의 '어느 저녁 때' 시를 <맛있는 시> 시집에서 재인용하다       

   



나무생각의 한순 이희섭 대표님의 아뜰리에에서 <맛있는 시> 시집 출간에 부쳐 봄놀이를 했습니다. 각자 고른 시를 한 수씩 읊으며 '음식'과 관련한 각자의 추억몰이를 쏟았지요. 한순 대표님이 낭송하는 이 시에 누구랄 것도 없이 눈물을 훔쳐내고 말았습니다. 누구는 부모를 떠올렸고, 누구는 자신과 자식들을 생각했지요. 누군가의 피와 살로 성장한 누군가가 다시 끊임없는 대물림 중인 의식. 그러고보니 가상하지 않은 존재 하나가 없더군요.       

   



매년 4월과 5월이면 찬란해서 더 아픕니다. 시대의 우울에 더해서 가장 아픈 통점 엄마를 떠나보내며 걸었던 시간들이 복기되어서지요. 유독 꽃을 사랑하던 엄마를 보내는 시간이 찬란한 전장터가 되고 말아서 더 섧고 쓰렸습니다. 시집 <맛있는 시>를 읽는 내내 엄마 생각에 자꾸만 자꾸만 멈춰섰지요.        


  

두부     

                                서윤규    

      

두부를 보면     

비폭력 무저항주의자 같다.     

칼을 드는 순간     

순순히 목을 내밀 듯 담담하게 칼을 받는다.     

몸속 깊이 칼을 받고서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칼을 받는 순간,죽음이 얼마나 부드럽고 감미로운지     

칼이 두부를 자르는 것이 아니라     

두부가 칼을 온몸으로 감싸 안는 것 같다.     

저를 다 내어주며     

칼을 든 나를 용서하는 것 같다.     

저를 다 내어주며     

칼을 든 나를 용서하는 것 같다.     

물어야 할 죄목조차 묻지 않는 것 같다.     

매번 칼을 들어야 하는 나는     

매번 가해자가 되어 두부를 자른다.     

원망 한번 하지 않는 평화주의자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죽이고 또 죽인다.     

뭉텅뭉텅 두부의 주검을 토막 내어     

찌개처럼 끓여도 먹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지져도 먹는다.     

허기진 뱃속을 달래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 두부는 비폭력 무저항주의자> 시인동네   


       

알량한 돈 몇 푼 보탠다고 한없이 유세를 부리던 딸년이 얼마나 아니꼬우셨을 텐데,칼이 된 말을 받아내면서도 소리 한번 내지 않았던 엄마는 두부를 닮아 있었습니다. 비폭력 무저항주의자로 사느라 화병으로 속이 문드러지고 물러져 그리 말랑말랑했나 봅니다. 그런 극진한 사랑아래 자라고도 내 새끼에겐 포악을 떠는 '나'란 동물은 어떤 존재일까요? 속으로 들끓는 용암으로 타들어가면서도 또 그렇게 살아낼 딸이 애처로웠을 테지요?     



외롭고 힘들고 배고파서 <맛있는 시>를 펼쳤는데 온통 엄마라는 그리움의 원형질에 닿아 그리움이 깊어집니다. 아마 애도가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어쩌자고 허기진 내 영혼을 채우던 엄마의 음식만 잔뜩 생각나는지,어쩌자고 이리도 이기적인지.       

   

'저녁밥 짓는데 넣으려는 검정콩 한 줌     

물에 불렸는데도 단단하다     

어디 단단한 슬픔이 있던가?     

콩은 뜨거운 입김 만나 순해지다     

쌀 속에 숨어 차진 콩밥 만들었다     

콩밥을 싫어하여 콩만 골라내던     

눈 맑은 그 아이 생각에 목이 메고     

잊고 살았던 슬픔의 오장육보에     

검은 콩알들 산탄처럼 박힌다'     

-<스피노자의 안경> 중 '콩밥 먹다가' 시를 <맛있는 시>가 재인용하다      


    

뻔뻔한 저를 위로하려는 듯 엄마가 천국에서 보내는 시 같아서 입술을 꼭 깨뭅니다. 단단히 삐쳐 뾰로퉁해져 있는 절 늘 품어주시던 엄마. 천국에서도 엄마는 쉴 틈이 없으실 듯합니다. 어둔해진 손으로도 외손자 밥상을 차려내시던 엄마.      


    

"원정아,엄마 모르게 나 좀 빼내주라. 할머니가 원정이 학교 앞에 방 얻어서 매일 따신 밥해줄게. 원정이랑 할머니만 아는 비밀로 하면 된다. 원정아. 할머니 좀 빼내주라. 학교 앞에서 원정이 밥해줄게......."     


     

이렇게 사무칠 줄 알았으면 단 며칠이라도 원하시는대로 해드릴 걸 그랬습니다. 당신의 존재 이유가 오로지 자식 손자 새끼들 거둬 먹일 일밖에 없었는데 그 존재이유를 빼앗아 버렸네요. 엄마,엄마, 내 엄마. 죄송해요. 미안해요.     




<맛있는 시>에는 달콤한 첫사랑과의 로맨스도 담겨 있고 아빠와의 진한 추억도,가족들의 지극한 사랑도 다 있는데 해결하지 못한 내면의 문제들때문인지 엄마만 자꾸 드러납니다. 고두현 시인 따라 마포 용강도 옛 창비 건물 맞은편 '진미 생태찌개'집에 먹으러 가도 더없이 좋을 테고. 오늘처럼 꾸물한 날은 멸치 다시 푹 우려 잔치 국수라도 해 먹을 일입니다. 또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햇빛을/연초록 잎들이 그렇게 하듯이/핥아먹고 빨아먹고 꼭꼭 씹어도 먹고/허천난 듯 먹고 마셔댔지만 그래도 남아도는 열두 광주리의 햇빛!'(16쪽 나희덕)의 '허락된 과식'을 할 일입니다.    


      

장독 깊이 묻은 김장이 익어가듯,나무생각 출판사의 대표 한순님은 <맛있는 시>의 기획을 20년을 묵히고 삭히며 발효에 발효를 더했습니다. '삶'이라는 효소의 작용이 적정해진 지금에사 밥상을 차렸습니다. EBS FM <시 콘서트> 방송대본을 2012년부터 써온 방송작가 정진아가 '안치고,뜸들이고,묵히고,한소끔 끓이고/익히고,삶고,찌고,지지고,다듬고,다지고,버무리고,비비고,푹 고고,빻고,찧고,잘게 찢고/썰고,까고,갈고,짜고,까불고,우려내고,덖고/빚고,졸이고,튀기고,뜨고,뽑고,어르고/담그고,묻고,말리고,쟁여놓고,응달에 널고/얼렸다 녹이고 녹였다가 얼리고'(180쪽 이문제의 '연금술' 중) 세상의 사랑 연금술 레시피를 모았습니다.     




토닥토닥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나 너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해서. 간장 소금 설탕 된장 고추장 인생의 기본 맛으로 그리움을 피워 올린 시간.  시고 달고 맵고 짜고 쓰고 떫어서 종내는 황홀하고 만 만찬입니다. 혀끝으로 코끝으로 남은 인생의 산미가 기억을 소환하고 추억을 새깁니다. 잔칫집의 낭자한 웃음소리가 달콤한 봄날을 불러내고 김밥 싸서 월드컵 공원에라도 가게 합니다. 비릿한 굴비 내음이 비굴을 강요해도 미각마저 굴복시키지는 못할 거에요.      


    

엄마가 그리워서 목이 메다가도 금세 일상으로 되돌리는 밥의 힘. <맛있는 시>에 그득한 거룩한 밥상. 눈물 콧물 씨익 닦으며 성큼 다가서는 사랑밥상.     

매거진의 이전글 11월 느린 오후의 빛을 만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