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구나ᆢᆢ......책을 펼쳐 서문을 읽고 1부 '숨' 챕터의 보라 간지를 펼침과 동시에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숨'이라는 한 글자와 보랏빛, 식물성 작가의 생존이 그냥 눈물겹다고 느껴졌어. 작가의 애상과는 판연히 딴판인 나의 애상이 파문을 일으킨 바. '순수'에의 의존을 거부하고 살았던 시간이 확 달려드는 듯 자꾸 눈물이 난다. 내 인생 최애 책이 될 듯해. '사랑'을 향한 세상 모든 '빛'의 아우성을 만날 듯해. 노스탤지어를 품은 가을의 빛이 스며들 듯해.”
책과 눈맞춤한 첫날의 마음을 나는 이렇게 표현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이런 소리가 올라온다. ‘숨비소리를 들었다.’ ‘숱한 빛을 만졌다.’ ‘다시 숨구멍을 틔웠다.’ ‘진정한 내가 되어 간다.‘. 저자가 노래한 ‘숨’, ‘색’, ‘글’, ‘별’에 나만의 의미가 생성되었다. 그는 ‘지금 사랑’에 지극하구나. ‘생명’의 원형을 만났구나. 드문드문 멈춰 서서, 오늘을 살지 않은 나를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을 유기한 내 눈동자가 흔들린다.
“무한화서는 유한화서의 농담이고, 사랑에 대한 은유라는 게 내 생각이다. 사랑은 유한하고, 유한한 사랑은 무한을 꿈꾼다.” -277쪽.
배롱나무의 꽃차례는 무한화서(無限花序)란다. 꽃이 꽃가지를 따라 아래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피어 무한히 자라고 핀다는 의미이다. 꽃이 피는 동안에도 성장하며, 꽃이 지는 사이에도 씨앗이라는 종속의 번성이 존재하는 의미를 저자는 놓치지 않았다. 설핏 삶의 유한함을 직시하라는 거겠거니 탄식하기 십상이나 그는 어떤 삶이, 혹은 사랑이 삶의 유한성을 늘리며 살 수 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나는 사람들이 상호작용 안에서 서로 물들이고 물드는 일에 관심이 많다. 인간은 유기체적 존재로 숱한 인드라망 안에 일부로 살아가지 않는가? 좁게는 가족, 멀리는 일면식 없는 누군가에게조차 연결되어 작용한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가 한 말이, 내가 보여준 삶이 누군가에게 깃들고 스민다. 그 자취와 흔적이 정신적 유산으로, 예술혼으로 각자의 꼴과 얼을 이루려니. 나는 어떤 삶을 살아내어 무한화서의 시간을 늘여갈 수 있을까? 덧붙인 칼 라르손의 <자작나무 아래> 그림이 담담한 진리를 말해주는 듯했다.
“황폐하고 쓸쓸해지지 않으려면 적시는 말들이 많아져야 하고, 생략된 괄호 안의 말들이 밖으로 나와 수다를 떨고 다정하게 굴어야 한다. 지금의 시대는 말의 양이 관계의 농도이고 사랑의 깊이다.” - 252쪽
지당하다. 나는 말은 드문 편이나 다행하게도 글로 대신하는 다정함이 있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마음으로 가닿는다면, 어린 날 주구장창 써댄 연애편지 공덕이다. 누군가를 앞에 두고 쓰는 글은 확실히 뭉근한 느낌이 전해진다. 그러고 보면 소셜 플랫폼에서 댓글을 통한 말걸기 혹은 감응하기를 하면서 호감을 산 적이 많다. 작가들이 쓴 책을 읽고 저자와 대화하듯 웅얼댄 것이 친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확실히 관계의 물리학을 잘 활용한 셈이다.
말에조차 효율성과 생산성을 논해야 할 만큼 피폐해진 우리에게 저자는 끊임없이 전복을 꿈꾸라고 권한다. 갓난아기들의 지능을 발달시키려면 엄마가 수다쟁이가 되어야 한다. 사랑하면 달뜬 마음에 말이 많아지기도 한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가 유죄’라 외쳤던 노희경 작가가 생각나는 문단들이 속속 출현했다. 곁들인 사진들에는 인상파 화가들의 빛 발산이 곳곳에 퍼져 있다.
좋은 그림이란 말걸기를 자꾸 하고 싶게 만든다. 시인의 산문이 역시 그러하다. 함축하여 색다른 방식으로 내린 정의들이 상상력을 자극하여 빛 무더기를 보게 하고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다양한 감상을 극대화해주는 그림들로 인해 나는 순간순간 어질어질하다. 그림을 고르느라 수십 번 글의 결을 더듬었을 편집자의 마음을 마중하고 싶다. 내가 뽑은 문장들이 편집자의 한 줄 문장이기도 해서 자주 흐뭇했다.
쓰기 시작하면서 삶의 감각이 예민해졌다는 시인의 말을 믿고 싶다. 더불어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고 싶기도 하다. 나를 표현하는 일에 게을렀으면서 내가 제대로 보여지길 바라는 일, 벼리고 닦은 시간도 없으면서 뭔가가 되어져 있기를 바란다. ‘내가 쓴 시간이 결국 나의 삶이라는 것’의 기준으로 보자면 나는 함량 미달, 자격 미달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을 쓴다는 것이고 곧 나의 삶을 쓴다는 것이다. ‘쓴다는 것’의 유용성. 방점을 찍는다.
그제 다녀온 생애 마지막이 될 거라는 북콘서트에는 온통 분홍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대도, 사람도, 책도 수줍은 연분홍이기보다 부활한 어른의 환한 분홍빛이었다. 담담한 서정을 노래하는 가수 시와, 윤상기. 글쓰기 제자들의 낭독, 김여진 앵커의 낭독,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준 작가의 시간, 100권째 책 <코나투스>의 유영만 교수, <돈의 속성> 김승호 회장의 축사 등. 시인인 스승을 사랑하는 제자 그룹 등 온통 ‘오늘 사랑한 것’에 몰입한 현존이 아름답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