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난 돌의 생존일기와 철학
20살, 지치고 괴로웠던 수험생활을 끝마친 청소년들이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나이이다. 내 주변 동기들과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새해 첫날 묵은 때를 털어내듯 몸에 독한 알코올을 끊임없이 밀어 넣고, 지난 몇 년간 입시란 이름으로 포기해야 했던 자유를 만끽했다. 대학 입학에 맞추어 자연은 우리에게 봄이란 선물을 준비했고, 벚꽃은 우리의 청춘을 축하한다는 듯이 만개했다. 10대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포기한 대가로 우리는 청춘을 선물 받은 것처럼 느껴졌으며, 작년의 눈물은 온데간데 지워지고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나 역시도 그러고 싶었다. 우울하게 지냈던 지난 2년가량의 시간이 끝나고 나에게도 봄이 오길 바랐다. 그러나 이런 나의 꿈을 비웃는 건지,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사실 중학교 때도 나는 '밝다'와는 거리가 먼 아이였다. 낙관과는 거리가 먼 비관주의자였고,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도 선을 긋는 것이 확실한 아이였다. 그럼에도, 대안학교에서 만난 좋은 친구들과 좋은 선생님들. 그리고 선물과도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리고 고 1 때, 난 아버지를 잃었다. 당연히 모두에게 슬픈 일일 테지만, 나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나의 취미, 사상, 장래희망 등 뭐 하나 아버지에게 영향을 안 받은 것이 없었고, 아버지와 함께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제일 닮고 싶은 존재였고, 제일 존경하는 위인이었다. 그런 존재가 내 눈앞에서 스러지는 것을 나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삼일장을 치르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었다. 늦둥이로 낳은 아들 때문에 아버지는 말년에 대인관계를 이어나가지 못했고, 아버지의 장례식장에는 적막함이 흐를 뿐이었다. 아들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전 돈 빌려간 아버지의 친구들은 얼굴 비추지도 않았고, 혈연이 아님에도 힘든 본인들의 경제상황 때문에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던 외가는 아버지가 투병하시던 동안 얼굴은커녕 연락 한 번하지 않았다. 장례가 끝나고, 17살의 나는 하루하루 죽음의 유혹과 싸워야 했다. 친한 친구들이 위로를 하고 곁에 있어주었지만, 어린 나에게 남은 것은 상처와 고통이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닫았고, 삶의 목적 없이 인생을 방황하는 부랑자가 됐다.
17살에 삶의 의미를 잃은 나는 살아야 했다. 죽고 싶었지만, 살고 싶었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사색했다. 아버지와의 과거를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기억했다. 손이 떨리고 서있을 수도 없게 다리가 떨렸지만, 멈추면 쓰러질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사유의 답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아마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답은 찾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는 매우 자유로운 분이셨다. 아들과의 토론을 즐기셨고, 어딘가에 갇혀 있거나 묶여 있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다. 그리고 항상 내게 넓고 다양한 세상을 보여주려 하셨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못 밟아보는 유럽 땅도 수없이 밟아보고, 미국도, 중국과 아시아에 여러 국가들도 경험했다. 표현은 서툴렀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하신 분이었다. 부끄러움이 많으셔서 칭찬도 잘 못하셨고, 애정표현도 잘 못하셨지만 아들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 발 벗고 나서시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본인을 대나무라고 비유하셨다. 자신은 부러진다고, 그러니 아들은 갈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너무 존경한 탓인지, 나 역시도 곧디 곧은 대나무로 자랐다. 아버지의 자유롭고 따뜻한 철학은 내게 그대로 전승되었다. 아마 이러한 철학이 내가 방황기에도 극단주의와 반인문적 철학의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막는 방파제가 아니었을까?
자유와 인간이라는 주제는 나를 자연스레 철학의 길로 이끌었고, 약 80년 전에 철학자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나의 철학은 미시적 부분에 국한되어 있었고, 길잡이 없는 혼란의 상태였다. 그러던 중 벤야민과의 만남은 나의 철학을 거시적인 사회로 지평을 넓혀주었다. 스스로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던 약 80년 전에 유대인은 현재 아웃사이더의 삶을 존경하는 한 청년이 혼란을 끝내고 자아를 찾게 했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나는 언제나 주류가 아니었다. 친구 관계에서도 주류가 아니었고, 대안학교를 다닌 비주류 수험생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주류 우파와 주류 좌파 모두를 비판하는 아웃사이더였다. 벤야민이란 아웃사이더와의 만남은 나를 아도르노로 이끌었고, 나는 그제야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키울 수 있었다.
아도르노에 표현에 따르면 나는 비동일자(das Nichtidentische)들을 위한 사회를 꿈꾸어왔다. 인류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하나의 들러리로 만들어버린 사람들, 진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동일성으로 인해 부정의 존재들이 되어버린 그들을 사회의 중심으로 소환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자유, 벤야민이 말한 지금시간. 모두 그런 의미였다. 우리 모두는 비동일자 아닐까? 인간은 다원적이고, 다층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무엇도 인간을 동일화하여 규정할 수 없다. 그저 지금의 사회가 인간을 동일화하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개인들은 스스로를 동일화한 것이다. 아버지는 항상 내게 말씀하셨다. 있는 그대로의 소중함,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그러기에, 나는 내 그대로의 소중함을 동일화하지 않을 것이다. 외롭고 고독할 것임을 알지만, 이는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은 비동일자들을 살리는 철학자의 임무라고 믿는다. 또한, 내 마음속에 아버지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다. 당신이 사랑한 아들이 그 자체로 살아가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못다 한 보답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