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여러분의 똑똑한 아이는 정말로 괜찮나요

에필로그|때론 학교는 감옥이며 타인은 지옥이다. 모범생도 예외는 아니다.

by 문현웅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친 날,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 대신해 발걸음이 향한 곳은 엷게 쌓인 눈이 포근히 녹아내리는 겨울날의 길이었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6km가 조금 되지 않는 거리. 갓 성인이 된 나의 걸음으로는 대략 한 시간 반이 걸리는 천변을 따라 이어진 도로. 공부를 위해선 한시라도 낭비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지난 삼 년 동안 차량으로만 지났던 그 길을, 나는 비로소 내 발로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중학교에서 집까지 거리는 2km에 살짝 미치지 못한다. 초등학교에서는 집까지 1.5km 남짓. 지난날의 생활반경을 끝에서 끝까지 최대한으로 잡아도 길쭉한 타원 모양의 형상은 장축이 8km가 채 되지 않는다. 나의 생애에서 12년을 잠식한 연옥은, 마음만 먹으면 반나절 내로 답파할, 그토록 하찮게 비좁은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안녕이다. 나의 협소하고도 사악한 복마전이여. 차마 굳바이라 말하진 못하리라. 그곳에서 나는 내내 아팠다. 상처가 아물어도 흉터를 지워내진 못한다. 더 이상 피는 흐르지 않더라도 삐뚤게 붙은 살점은 평생을 가는 불편을 남긴다. 12년에 걸쳐 누적된 숱한 상흔은 미성년이었던 내가 건전하고도 평범한 정신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여정을 무던히도 방해했다. 그러했던 결과 사고관 속 어딘가가 격렬하게 비뚤어진 인간으로 나는 성장해 버렸다. 원망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서울대는 분명 의무교육 12년을 정리하기에 좋은 마무리였다. 그러나 끝이 좋다 해서 결코 모두가 좋을 수는 없다.


솔직히 말하건대, 조금은 모르는 채로 살고 싶었다. 내가 여러 모로 글러먹은 적잖이 결여된 인간이라는 것을. 하지만 주변은, 그리고 배움의 터전이라는 공간은, 나의 그러한 부족함과 결함을 기어이 헤집고 드러내며 조리돌림했다. 그런 내게 학업은 자기 방어기제였다. 감추고 싶던 못난 구석을 다른 사람 손에 붙들려 만천하에 드러내고 만 나는, 다른 분야에서라도 남들을 앞서며 자존감을 지키고 스스로의 가치를 납득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시력을 잃고서 더듬이가 기이하게 발달한 잠자리처럼, 다른 역량이 평균에 비해 처지는 나는 성적만 유달리 도드라지는 불균형 속에서 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언밸런스는 나의 학교 생활을 더욱 힘들게 하는 악순환의 주요한 축으로 기능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한 비틀림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로 나는 어른이 되고야 말았다.


나는 생각했다. 이러한 굴레를 경험하는 모범생이 결코 나 하나만은 아니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 또한 상당수는 마음 기댈 곳 하나 없이 그저 나름의 방식으로 상황을 타개해 보고자 오늘도 외로이 싸워 나가고 있으리라는 것을. 과거의 내가 그러하였듯.


/Nano Banana Pro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부모들은 모른다. 아이들은 잔혹하다. 우리가 감히 짐작할 수 있는 차원보다도 훨씬 더. 도덕이나 철학적 판단과는 별개로, 아주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촉법과 소년법은 반듯하게 자란 여러분 자녀의 지대한 적이며 위협이다. 모난 돌은 정을 맞고 특별히 우수한 여러분의 아이는 집단 괴롭힘에 취약하다. 그럼에도 생각이 깊고 마음이 여린 학생은 욕망에 휘둘리며 폭력을 즐겨 쓰는 또래에게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단이 변변찮다. 실제로 이 시리즈에서는 잔혹한 소년범죄 묘사가 과도할까 우려해 많은 부분을 의도적으로 제외했으나, 경험했던 현실에선 금품 갈취나 폭행 또한 굉장히 빈번한 일이었다. 당하는 쪽에서는 알량한 미신에 기대 남몰래 가해자의 이름을 붉은색 볼펜으로 적어 나가는 것 이외엔 마땅한 대항 수단이 없었다. 물론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던 무리는 상응하는 처벌이랄 것을 무엇 하나 받지 않았다. 소년이었으니까.


손해는 늘 잃을 것이 많을 쪽에서 보기 마련이다.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나 역시 모조리 뒤엎을 각오를 해 본 적 없던 바도 아니다. 막말로 상대가 누구건 흉기를 들고 기습을 하면 가장 원한이 깊은 아이 하나쯤은 어떻게든 제압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모범생과 불량아의 커다란 차이점 중 하나는, 뒷일이랄 것을 면밀히 생각한다는 것이다. 앞날을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지능이 학교 생활에 있어선 오히려 독이다. 뒤가 없는 아이들은 그나마 솜방망이인 소년법마저 고려에 넣는 법 없이 당장의 기분과 욕망에 충실하다. 그것에 당하는 쪽은 늘 꿈이 원대하고 장래가 유망한 학생들일 따름이다. 그저 머리만 좋을 뿐 음습한 정치력이나 압도적인 무력, 잔혹한 성정을 갖추지 못한 아이는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나 우수한 인재이며 미래의 동량이다. 교실 안에선 산 채로 잡아먹힐 최약체에 불과할 뿐.


그러한 상황에 교권이 해답일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자명하다. 우리는 서이초 사건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흘러가고 처리됐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자식이 학교에서 하이에나 짓을 하고 다니는 집안은, 높은 확률로 부모 또한 성품이 들개 수준을 오가기 마련이다. 학부모까지 자녀를 싸고 돌기 시작하면 교사로서도 대응할 방도는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아들딸과 비슷하게 대체로 점잖은 모범생의 부모는 상황이 막장으로 치달을 때까지 무엇 하나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비로소 뒤늦게 깨달은 때 자녀의 학창 시절은, 정신은, 마음은, 인격은, 어린 날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소중한 것은 이미 손쓸 도리가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기 마련이다.


학교가 통제를 포기하거나 실패한 탓에 마음대로 날뛰는 Bully가 지능은 탁월하되 소심하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Nerd를 무참하게 짓밟는 꼴은, 결코 남의 나라나 미디어 속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만일 이것이 여러분의 자녀가 현실에서 실제로 겪는 일이라면, 아무튼 서울대를 도피처로 삼을 능력이 된다는 이유로, 너는 충분히 행운아이며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일러줄 수 있겠는가.


진심으로 나는, 우수한 아이들이, 올곧고 바르게 자라나길 희망한다. 마음속 어둠이나 트라우마, 세상에 대한 분노나 조소 같은 감정은 굳이 품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불필요한 앙금이며 찌꺼기일 뿐이다. 학생들이 원대한 꿈과 소망을 동경하는 대신, 그저 현세의 지옥을 피하겠다는 일념으로 서울대를 지망하도록 조장해선 안 된다. 국가로서는 물론 당사자 개인의 입장에서도 그러한 열망은 장기적인 성장에 도움이 될 충동이 결코 아니다. 노여움과 한으로 왜곡된 질주란 것은 대부분 아름다운 결말을 맞이하기 어려웁다. 끝내 과거를 극복하지 못하고서 비뚤어진 그대로 하찮은 어른이 되어 버린 나는, 그것을 선생님들께, 학부모님들께, 그리고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어 이토록 긴 글을 적어 내렸던 것이다.



#마지막 편입니다.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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