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죄책감 사이

by 묘연

대부분의 엄마라면 아이를 만나기 전에 남편을 만나 엄청난 사랑을 한 번씩 경험한다.

개인마다 그 정도는 다르겠지만 어쩌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건 아무래도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나도 엄마가 되기 전 한 남자를 너무 사랑해서 그 사람의 작은 모습에도 울고 웃었을 때가 있었다.

너무도 사소해서 도무지 기억도 나지 않는 일로 우린 서로 죽일 듯이 싸웠고, 별일 아닌 일로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했다.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널뛰는 감정들을 서로 보듬고 또 보듬으면서 함께 하는 시간들을 찐하게 물들였던 그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그 시절의 사랑이 예행연습 정도로 느껴진다면...

아이를 낳아 길러보니 그와 연애했던 시절 태풍이 몰아치는 날의 파도 같았던 마음들이 아주 잔잔하게만 느껴진다면...

아이와 함께한 시간은 남편과 한 시간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데... 그 사랑의 농도가 너무 진해서 남편과 함께한 10년의 태풍을 잠재우고 아무리 물을 타고 도통 연해질 줄 몰랐다.

아이를 그렇게 진하고 강하게 사랑한다면 큰 바다가 되어 넓고 깊게 아이를 품으면서 살아갈 것 같았지만 실상은 나도 얼떨결에 하게 된 이렇게 감당이 안 되는 진한 사랑에 발을 담그고 어쩔 줄 몰라할 뿐이었다.

남편과 그랬던 것처럼 아니 이 감당 안 되는 커다란 사랑 앞에 더욱더 작아진 나는 아이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울고 웃으며 하루하루를 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미치도록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얼마나 예민하게 되는지. 사랑하는 사람의 작은 제스처에도 울고 웃어본 사람들은 안다. 얼마나 쪼잔해지고 사소해지고 얼마나 약해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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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가장 작아지는 나를 느낄 때는 단연 화가 날 때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가 날 때의 그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에 이 감정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더더욱 사과하는 방법은 더 모르겠다.

다 큰 어른이 돼서 아이에게 가르쳐주어도 모자랄 판에 나는 이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잘 몰라서 오늘도 이 작고 예쁜 아이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화가 자주 났다. 돌이켜 보면 아주 사소한 일들...

새벽부터 일어나 밥을 준비했는데 한 숟갈도 먹지 않을 때, 일부러 그런 건지 실수로 그런 건지 먹지도 않은 식판을 엎었을 때, 나 몰래 화장실에서 물장난을 쳐서 안방이 한강이 되어있을 때, 이유 없이 떼를 쓰거나 안 되는 것들을 한다고 할 때, 짐이 많은데 길에서 안아달라고 뻐댈때 나는 화가 난다. 아니 그것보다 화가 나는 이유는 생각보다 많다.

그냥 '화가 난다.'라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가슴에서 끓어오는 분노를 느끼게 될 때도 있다. 어떨 땐 나도 모르게 정말 입에서 욕이 나온 적도 있었고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등짝 스매싱을 날린 적도 있었다. 어느 날은 정말 눈동자가 시리도록 내 눈빛이 차갑게 변하는 것이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차가운 칼날 같은 눈동자로 아이를 바라본 날.

그런 날 밤엔 모든 집안일들이 끝나고 자는 아이 옆에 누워 아이를 바라보면 어김없이 엄청난 죄책감이 몰려왔다.

‘이렇게 예쁜 아이에게 나 왜 이렇게 못났지? 조금만 참을걸... 내가 어른인데...’

‘이런 못난 엄마지만 그래도 내일 되면 또 엄마 보면서 웃어줄 거지?’

이런 생각들이 마음을 더 어지럽고 복잡하게 만든다.

누구나 그렇다. 화를 내고 나서 마음이 편한 사람은 없다.

마음이 불편해서 화를 냈지만 화를 내고 나면 더 불편해지는 이 불편한 진실.

알면서도 매일 그런 일들이 되풀이된다.

이 작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때만 해도 ‘밝고 건강하게만 자라 다오.’ 간절히 기도했던 마음은 어디 가고 엄마 말 좀 잘 들어달라고 바라는 엄마의 욕심.

나를 좀 덜 힘들게 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엄마의 욕심.

좀 수월하게 커주었으면 하는 엄마의 욕심.

욕심이 점점 많아진다. 그리고 그 욕심이 많아질수록 마음엔 화가 쌓인다.

'아니 왜 이렇게 힘들게 해!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왜 이러는 건데!!'

사실 조금 마음을 내려놓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세상 차갑게 노려봤던 시리고 무서운 눈동자가 아른거린다.

그 눈동자를 보면서 아이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하니 나 자신이 그렇게 미워질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그때의 상황을 곱씹어 보면 또 화가 난다.

‘잔인한 건 너였어! 내 감정을 극한으로 몰고 간 건 너였다고.’

그렇게 마음속에서 두 가지의 감정이 오늘 밤에도 한데 엉켜 내 마음을 이쪽으로 저쪽으로 잡아당긴다.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그리고 걱정도 된다. 아까 노려보았던 눈빛은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혹여나 상처를 받은 건 아닐까... 날 미워하면 어떡하지...

인내심의 줄이 '탁' 하고 끊어지던 그 순간이 자꾸만 떠올라 잠이 오지 않는다.

.

.

.

라고 생각할 때 쯔음...

고단한 몸은 생각과 다르게 잠이 들어버린다.

그렇게 분노와 죄책감 사이에 하루가 저물고 동이 터온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어제와 다른 오늘이 시작되었고 아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내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잠들어있다.

천만다행이다. 자고 일어나면 또 새로운 하루가 밝아서 다행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좀 더 크고 깊은 사랑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우리에게 다시 함께 할 내일이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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