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엄마, 엄마와 나, 그리고 아이까지 이어진 마음
전화벨이 울렸다. 핸드폰을 들어 보니 ‘엄마’였다. 순간 '지금 엄마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이지?' 혼란스러웠다. 아, 맞다. 지금 울리는 건 엄마의 핸드폰이었다. 외할머니의 전화였다.
"할머니 저 미진이에요"
"그래, 미진이냐~ 왜 엄마가 안 받고..."
원래대로라면 주말에 할머니, 엄마, 이모와 함께 벚꽃 구경을 가기로 했었다. 그러나 엄마의 몸 상태가 나빠지면서, 여행은 취소되었다. “건강이 먼저지”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며칠 뒤, 할머니는 엄마의 안부가 궁금해 전화를 걸었다. 어제 엄마는 대학 병원에 왔으며 여러 검사를 받고 입원했다고 말했다. 엄마의 상태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사실대로 전하면 할머니의 걱정을 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의 팔과 다리에 마비가 왔다는 말에 할머니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큰 이모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크게 울며 걱정을 쏟아냈다고 했다. 아뿔싸, 내가 일을 시끄럽게 키웠다. 그제야 알았다. 어른들에게는 때로, ‘적당한 거짓말’이 걱정의 완충재가 된다는 것을.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결혼 후 충청도 삽교의 작은 시골집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곳은 신혼의 시작이었고, 여섯 남매가 태어나 자란 곳이며,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지금까지도 삶을 살아내는 터전이다. 할머니의 삶은 한 곳에서 수십 년간 뿌리를 내리는 나무와 닮아있다. 할머니는 억척스럽게 논, 밭농사를 하며 육 남매를 낳아 키웠다. 엄마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도시락은 밥 위에 손가락으로 만든 구멍에 고추장을 담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는 학창 시절 소시지를 가져온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고 말하곤 했다. 육 남매는 편도로 4km가 넘는 학교를 걸어 다녔다. 학교가 끝나면 밭일을 도왔다. 그 시절의 육 남매는 당연한 듯 인내하고 감내하며 자랐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성실함 때문일까. 성인이 된 지금은 모두 각자의 가정을 꾸려서 제 밥벌이 이상을 하는 부모들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눈에는 엄마나 일곱 살짜리 손녀나 여전히 ‘아이’였다.
며칠 뒤 이모한테 들은 얘기인데 할머니는 엄마 걱정이 가득해 매일 나가던 마을회관에도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회관에서 동네 할머니들과 함께 먹던 점심이 할머니가 누군가와 함께 먹는 유일한 식사인데. 입맛을 잃고, 밥도 챙기지 못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다른 자식들도 모두 걱정이 태산이었다고 한다. 그제야 알았다. 그날의 전화 한 통은 할머니에게 저지른 큰 불효 였음을. 크나큰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얼마 뒤 할머니는 병원비에 보태라며 큰돈을 보내왔다. 임신 중인 내 끼니를 위한 용돈도 함께였다. “삼촌들한테는 말하지 말거라.” 덧붙인 그 한마디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한편으로는 ‘나는 이렇게 큰 금액을 엄마의 병원비에 보태지 못했는데’ 생각에 한참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짜디짠 밀물처럼 밀려왔다. 덧붙여 할머니는 임신한 상태에서 엄마의 간호를 하는 나에게 고맙다며 내 용돈도 추가로 보내셨다.
그 돈은 단순한 돈이 아니었다. 뙤약볕 아래서 손톱 밑이 까맣게 그을리도록 온종일 일해 번 돈이다. 십 년 넘게 신은 양말조차 아까워 꿰매 신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가 자식이 온다면 냉동고 깊숙이 숨겨둔 고기와 생선을 꺼낸다. 특히 나는 할머니의 손맛과 짠맛이 담긴 생선 조림을 참 좋아한다. 할머니의 삶은 허기로 가득했지만, 자식들은 충만하기를 바랐다. 그 돈에는 외로움과 사랑, 그리고 긴 세월이 담겨있다. 할머니가 큰돈을 모으기까지 어떠한 외로움의 시간을 보냈을지 나의 작은 마음으로는 가늠할 수 없다. 할머니는 자신의 삶의 깊숙했던 고난을 견디고 얻은 수확을 자식에게 보냈다. 나는 그 돈을 보며 할머니와 엄마, 엄마와 나, 그리고 나의 뱃속의 아이까지 길게 이어진 애착과 연대를 느꼈다, 가슴이 붉게 바다처럼 너울거렸다. 나는 손을 꽉 쥐었다. 충만하고 너울거리는 이 온기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이 뜨거운 마음이 밖으로 새어 나갈까 아쉬워 충만한 마음을 부여잡았다. 우리를 잇는 마음의 체온은 오래도록 따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