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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정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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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Lee Apr 03. 2020

머리를 못 감겠는 아침

정병일기 1

눈을 떠보니 베개 위에 놓인 내 머리카락이 더 이상 가닥가닥 흩어지지 않고 연필심처럼 뭉뚝뭉뚝하게 뭉쳐 있었다. 서로 뭉쳐 있는 머리카락 덩어리들을 그냥 보기만 하다가 다시 눈을 감는다. 기독교인들은 무슨 의식처럼 기름 붓는다는 말을 쓰던데 나야말로 정수리에 폐식용유를 부은 것 같다. 왠지 베갯잇도 기름종이처럼 투명해졌을까봐서 고개를 들었다.


상체만 조금 일으켜서 휴대폰을 들고 앉는다. 기름진 머리가 자꾸만 관자놀이에 흘러내려서 얼굴까지 끈끈한 느낌이다. 건성피부라고 해도 이 정도로 기다리면 유분이 나오는구나. 머리를 감은 지 4일도 넘어 5일이 다 되어간다는 걸 생각하면, 조만간 다시 병원에 갈 때였다. 선생님은 언제나 내 마음대로 약물치료를 끊는 게 제일 나쁘다고 말했지만, 착한 사람이 될 힘도 돈도 없었다. 베개 옆에 놔둔 머리끈은 있었다. 세 번이나 겹쳐서 꽉 묶고 폰을 집어 들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왜 연례행사로 머리 감았는지 알겠다." 오늘 아침 바쁘다더니, 이런 바보 같은 카톡은 또 금방 읽는다. A는 곧바로 조상님들을 무시하지 말라고 답장했다. "꽉 묶으니까 머리가 떡졌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어. 쪽지고 다닐까봐." 바쁜 A가 시덥잖은 농담에 두 번이나 웃어주지는 않았다. 앞머리에 핀까지 꽂고 텔레비전을 틀었다.


리모컨을 누르기가 무섭게 간장게장이랑 양념게장 세트 가격이 큰소리로 흘러나왔다. 새벽까지 텔레비전을 켜놨더니만 내 귀도 어지간히 닳고 무뎠었는지, 자고 일어난 새귀에다 그 소리를 갑자기 때리니까 굉장히 크다. 홈쇼핑 쇼호스트는 반으로 잘린 게를 있는 힘껏 눌러서 사방팔방으로 튀어나온 그 찐득찐득한 살을 힘차게 밥에 비볐다. 나는 손에 힘이 안 들어가서 옆에 있던 생수병도 들 힘이 없었다.


조금만 앉아있다가 일어나야지, 싶었는데 어느새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2시간이 지났다. 배가 고프지만 먹고 싶지 않고, 졸리지만 자고 싶지도 않고, 머리가 착 가라앉아서 무겁고 뻑뻑한데 씻고 싶지도 않다. 언젠가 오늘 하루를 시작하겠지만 일단 지금은 말고, 10분만 미루어보자.


10분씩 미루는 사이에 2시간 4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뭔가 먹으려면 집 앞 편의점에 다녀와야 했는데, 5분도 안 걸릴 그 짧은 거리가 머릿속 시뮬레이션으로 맴돌았다. 일단 손에 힘을 주어서 바닥을 짚고 일어나고, 발에 힘을 주어서 집구석을 돌아다니며 옷을 찾고, 몸에 힘을 주어서 문을 밀고 나간다. 아무래도 그렇게 힘주어서 내 몸을 편의점까지 밀고 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누워서 쉬려니 다시 기름진 머리를 베개에 대기 싫었다. 나는 지금 앉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어나지도 눕지도 않은 것뿐이었다.


지금 화장실에 들어가서 머리를 감는다면 분명 개운해지겠지. 그동안 오래 안 감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상쾌할 것이었다. 확실하게 쾌감을 얻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 순간을 더 오래 미루고 싶었다. 머리까지 감아버려서 그나마 그 쾌감까지 너무 빨리 소진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똑딱핀까지 꽂아서 그런지 머리가 더 이상 무겁거나 근지러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머리 감는 건 일단 미루고, 억겁의 시간을 들여 집에서 입던 늘어난 내복 위에 낡은 패딩을 걸치고 편의점으로 기어가기로 했다.


형광등 불빛은 너무 현란하고, 컵라면 종류도 너무 많고, 바닥이 갓 닦였는지 너무 미끄러워서 어지러웠다. 생각해보면 한발 한발 쓰러지지 않고 균형을 맞추어 직립보행을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 자신을 장하게 여기며 끊임없이 격려한 결과, 비로소 검은 비닐봉지에 컵라면 두 개랑 젓가락 두벌을 들고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 물을 마시자. 머리 감는 쾌감은 또 이걸 먹고 난 후로 미루자. 홈쇼핑에서는 교통사고 당했을 때 자식한테 손을 안 벌릴려면 우리 보험을 가입하라고 힘차게 외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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