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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환 Jun 16. 2022

뱅쇼 마시는 은발의 두 여인

서점일기

책방을 운영하면서 날씨와 계절에 민감해졌다. 비 예보가 있으면 좋아하다가(비오는 거 좋아한다) 이내 ‘오늘 손님 없겠군.’ 하면서 낙담하는 것 같지만 사실 손님은 늘 없기 때문에 비를 핑계삼을 수 있어서 내심 안심한다. 해가 쨍쨍하고 맑은 날이면 ‘하늘이 정말 예쁘네’ 하고 좋아하다가 다시 ‘오늘 다들 놀러가고 책 사러는 안 오겠군.’ 하고 미리 하루를 내다본다. 1월 초, 한겨울에 문을 열었을 때 너무 추워서 얼른 봄이 왔으면 하고 간절히 기다렸다. 봄이 오면 손님도 함께 오는 줄 알고. 그러나 기다리던 손님들은 따뜻한 봄바람에 실려 산으로 들로 떠나가고 말았다. 


그래도 꾸준히 오시는 단골 손님이 생기고 있다. D 여사님은 가오픈 때 처음 오셨는데 짧은 은발 머리에 고상한 말투로 ‘이런 공간이 생겨서 너무 좋다. 어떻게 이런 걸 할 생각을 했어 글쎄~ 예쁜 것들만 잔뜩 모아놨네.’ 대화를 나누다가 한때 같은 교회에 다녔다는 걸 알고 더욱 반가워하셨다. 그 뒤 한동안 D 여사님이 알려줘서 왔다며 여러 사람이 다녀갔다. 또다른 은발의 여인, H 여사님은 처음에 손자나 손녀를 데려오셔서 아이들 책을 한 권씩 사가셔서 큰 인상은 없었는데, 어느 날 오셔서 중고책과 원서를 주문하고 싶어하면서 특별손님이 되었다. ‘원래는 내가 서울 사는 큰 딸한테 시키던 거야. 근데 집 앞에 이런 게 생기니 이제 여기 사장님한테 부탁하면 되겠다 싶어서 너무 잘 된거지.’ 사실 처음에는 거절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연세가 있으셔서 온라인 구매가 어렵고 책방을 이용하고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하시는 마음을 알아서 그것 또한 책방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도와드리기로 했다. 원서와 중고책은 매입 방법이 다를 뿐더러 거래처를 뚫기에는 거래량이 턱없이 소량이기 때문에 할 수가 없다. 중고책은 A 온라인 중고서점에서 사서 2000원 정도의 수수료를 붙여서 팔고, 원서는 도매거래처에 있는 책이면 괜찮은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A나 K 온라인 서점에서 사서 같은 가격으로 전달해 드리는 걸로 정리했다. 주로 미술평론, 화가의 에세이를 많이 주문하셨고, 지금은 절판되고 없는 책들이나 <김병종의 화첩기행> 같은 건 현재 문학동네에서 새로 출간되었지만, 옛날 효형출판사 판본을 꼭 구해서 읽으셨다. 


이 두 분은 알고보니 친구셨다. 어느 날 같이 오셔서 뱅쇼(겨울에는 뱅쇼를 판다)를 시켜놓고 책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한참 하셨다. 저녁이 되면 주로 두 분의 전용 공간이 되었는데 나는 두 분의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프랑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창가 테이블에 고운 백발의 두 할머니가 앉아서 뱅쇼를 마시며 미술과 영화,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은 비현실적이었다. 나도 책을 읽고 그런 사람을 사귀어 저렇게 아름다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뱅쇼는 2월까지만 끓이겠다고 했지만 뱅쇼 주고객인 두 분이 3월까지는 하면 안 되겠냐고 하셔서 3월 중순까지는 준비했었다. 몇잔 더 팔아보겠다는 생각보다는 두 분이 뱅쇼 마시는 모습을 더 오래 보고 싶어서였다. 


두 분은 친구지만 성격이나 성향은 매우 달랐다. D 여사님은 조용히 생각하고 반려견을 산책시키고 책을 오래오래 읽는 것 외에 별다른 활동을 안 하신다. 소로의 책처럼 자연 속의 삶, 숲, 자연, 귀촌 관련된 책을 한 권씩 사서 오래 읽고 오래 생각하신다.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길에 들러서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읽은 책 이야기를 해주시고, 당신의 고단한 인생살이도 슬쩍 털어놓으시고, H 여사님은 자꾸 본인이 좋아하지만 (나는 별로인) 책을 읽으라고 추천하고 (강제로) 빌려줘서 못살겠다고 귀여운 뒷담화도 하신다. H 여사님은 봄이 되면서 본격적인 야외활동과 전시회, 음악회를 섭렵하고 다니시느라 발길이 뜸해지셨다. 그래도 가끔 어디 다녀오시는 길에 들러서 문자로 주문한 책을 찾아가거나 맥주를 시켜 맛있게 드신다. 나에게도 D 여사님에게 그러듯이 당신이 읽은 책 중에서 책방 관련 책과 여행 관련 책을 읽어보라며 (강제로) 빌려주신다. 삶에 대한 에너지가 넘치고 체력도 좋으시다. 


요즘은 D 여사님이 부쩍 몸이 안 좋아보인다. 얼굴이 수척하고 입술에 핏기가 없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어제 오랜만에 오셔서 차를 한 잔 시켜놓고 머리는 벽에 기댄 채, (눈도 감으신 것 같다) 가만히 계셨다. 보통은 나에게 이런저런 동네소식과 책 이야기, H 여사님 이야기, 가족이야기 조곤조곤 해주시는데, (입담이 은근히 좋고 재밌으시다) 어제는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다 ‘사장님, 음악이 너무 좋다. 음악 듣다가 죽고 싶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죽는다’는 말은 누가 말하든, 언제 말하든 섬뜩한 말이잖는가. ‘음악이 편안하게 보내줄 것 같애.’라고 하셔서 두번째 놀랐다. 놀라면서도 어쩐지 ‘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나 친구들의 우는 소리보다는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좋은 음악이나 향기를 맡으며 눈을 감는 게 더 낭만적이고 행복한 일 아닐까. 내가 죽는 마지막 순간에는 책방의 디퓨저 향기를 피우고, 늘 틀던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달라고 해야겠다. 


오늘도 두 분은 5분도 안 되는 시차를 두고 다녀가셨다. D 여사님은 어제보다 더 안 좋은 얼굴로 주문하신 책을 가져가시는데 걱정이 많이 되었다. ‘오늘도 좀 앉았다가 가고 싶은데 요즘 몸이 너무 안 좋아. 가슴이 답답해.’ H 여사님은 오늘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전시회를 다녀오시면서 이건희가 쓴 절판된 에세이집을 중고로 주문하고, D 여사님 부르려는 걸 내가 몸이 안 좋으시다고 전해드렸고 아쉬워하며 들어가셨다. 하루종일 다녔을 텐데도 목소리와 발걸음이 여전히 씩씩하셨다. 


두 분은 많이 다르지만 책 이야기를 나누는 서로에게 유일한 동네친구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풍경이 책을 좋아하는 두 사람(친구나 연인, 또는 가족)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작은 목소리로 책 이야기를 소곤소곤 나누는 모습이다. 특히 두 분이 앉아계시면 나의 책방은 마치 오랫동안 세월을 쌓고, 이야기를 쌓은 동화 속 책방 같은 멋스러운 공간이 된다. D 여사님 몸이 회복되어 두 분이 같이 오시면 사진 한 장 남겨야겠다. 동네책방에서 뱅쇼 마시면서 책 보는 두 할머니.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 풍경을 사진으로 ‘정지’시키고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꺼내 보고싶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더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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