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연구의 최전선에서는 현재 흥미로운 가설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암은 유전자의 병이기 이전에 대사의 병이다"라는 관점입니다. '메틸 기증자 경쟁(Methyl donor competition)' 모델은 이 관점의 핵심을 꿰뚫고 있습니다.
세포 내에서 유전자의 스위치를 켜고 끄는 후성유전학적 조절(Epigenetics)에는 SAM(S-adenosylmethionine)이라는 연료가 필수적입니다. 문제는 이 연료가 무한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만성 염증은 세포 내 한정된 자원인 SAM을 두고 치열한 쟁탈전을 유발하며, 이 과정에서 유전체의 균형이 무너지고 암이 태동하게 됩니다.
만성 염증이 암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단순한 세포 손상이 아닌, '대사 자원의 고갈로 인한 시스템 붕괴' 과정입니다.
만성 염증 상태(감염, 비만, 흡연 등)에서 뿜어져 나오는 IL-6, TNF-α 같은 사이토카인은 세포 핵 내의 DNA 메틸화 효소(DNMT)를 과도하게 발현시킵니다. 급증한 DNMT는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세포 내의 SAM을 독식합니다.
폭주하는 DNMT는 SAM을 이용하여 종양 억제 유전자(Tumor Suppressor Genes)의 프로모터를 집중적으로 메틸화시킵니다. 암을 막아야 할 유전자들이 이 과정에서 강제로 '침묵(Silencing)' 당합니다.
DNMT가 특정 부위에 SAM을 낭비하는 사이, 정작 유전체 전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SAM은 고갈됩니다. 그 결과, 평소에는 메틸화로 굳게 잠겨 있어야 할 반복 서열(LINE-1 등)과 전이 인자들의 빗장이 풀립니다. 깨어난 이 '유전적 기생충'들은 DNA 곳곳을 끊고 이동하며 유전체 불안정성(Genomic Instability)을 극대화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염증 반응에 동원된 호중구(Neutrophil)는 활성산소와 클로라민을 생성하여 SAM의 원료인 메티오닌(Methionine) 자체를 산화시켜 없애버립니다. 즉, 소비는 늘어나는데 공급은 끊기는 '이중고'가 발생합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유방암, 특히 예후가 나쁜 케이스에서 뚜렷하게 관찰됩니다.
유방암 세포는 메틸화 불균형을 이용해 이동 능력을 획득합니다.
CXCR4 (수신 안테나): SAM 부족으로 인한 저메틸화로 과발현됩니다. (안테나를 켬)
CXCL12 (유도 신호): DNMT의 공격으로 과메틸화되어 꺼집니다. (자체 신호 차단)
결과: 암세포는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신호(CXCL12)가 풍부한 폐나 간으로 이동하는 전이 성질을 갖게 됩니다.
삼중 음성 유방암에서는 염증 신호인 IL-6가 STAT3 단백질을 활성화합니다. 이 STAT3는 혼자 작동하지 않고 DNMT1을 납치(Recruit)하여 특정 암 억제 유전자 부위로 끌고 갑니다. 이는 SAM을 낭비하는 동시에, 암세포의 생존을 돕는 유전자들만 선별적으로 켜지게 만드는 정교한 전략입니다.
기저양(Basal-like) 유방암에서 염증 인자(NF-κB)는 잘못된 메틸화를 지우는 효소인 TET1을 억제합니다. 즉, 염증은 DNA에 잘못 쓰인 낙서를 지울 지우개마저 없애버려, 암세포가 면역 감시를 피하도록(Immune Evasion) 돕습니다.
이 모델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명확합니다. 이미 망가진 유전자를 하나하나 고치거나, 이미 폭주한 효소(DNMT)를 억제제로 막으려는 시도는 부작용이 크고 한계가 명확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치료와 예방 전략은 "염증이라는 화재 진압"입니다.
자원 보존: 만성 염증을 차단하면 DNMT의 과발현을 막아 아까운 대사 자원(SAM)이 낭비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 정상화: SAM이 골고루 분배되면, 암 억제 유전자는 다시 켜지고(탈메틸화), 위험한 전이 인자들은 다시 잠기게(메틸화) 되어 유전체 안정성이 회복됩니다.
임계점 관리: 암으로 가는 유예 기간 동안, 생활 습관 교정과 항염증 치료를 통해 메틸화 흉터(Epigenetic Scar)가 '돌이킬 수 없는 임계점'을 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합니다.
결국, 암과의 전쟁은 암세포를 죽이는 것만큼이나, 내 몸의 대사 자원이 엉뚱한 곳(염증)에 낭비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병참전'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