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런던 소재 싱크탱크 ‘공적통화금융기구포럼(OMFIF)’은 세계 각국 중앙은행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 결과를 발표했다. 향후 1~2년간 위안화 보유에 대한 질문에서 30%가 ‘보유 확대’ 의사를 밝혔는데, 이는 지난해 동일 설문 결과인 10% 대비 3배였다. 그러나 달러화 보유에 대한 질문에는 20%가 ‘지금보다 축소할 것’이라고 답했다. 위안화의 위상 확대가 세계적 흐름으로 보인다.
국제통화기금에 의하면 지난 3월 말 기준 전 세계 외환보유액은 미국 달러 59.5%, 유로 20.5%, 엔 5.8%, 파운드 4.7%며 중국 위안화는 2.4%로 5위다.
중국은 세계 2위 경제대국임에도 상대적으로 낮은 위안화의 위상 확대를 위해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 발행에 가장 적극적인 점이다. 올 3월 청두에선 4000만 위안을 CBDC로 실제 사용했고, 내년 2월 열리는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선 외인들이 디지털 위안화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또한 중국과 거래하는 국가와 기업을 대상으로 무역 결제 시 위안화 사용을 압박하고 있다. 그 결과 지난해 세계 7대 석유 메이저 중 하나인 영국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은 중국에 납품한 원유 대금으로 달러 아닌 위안화를 받았다. 이는 세계 메이저 석유 회사가 위안화를 무역 거래에 사용한 상징적 사건이다.
과연 위안화는 달러 패권을 흔들 수 있을까. 역사상 최초의 기축 통화는 영국의 파운드화였고, 다음이 미국 달러화이며 달러는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두 기축 통화의 흥망성쇠를 돌아보며 미래를 추측해본다.
최초의 기축 통화 탄생 배경
기축 통화까지는 아니었지만 여러 국가에서 통용되는 국제 통화의 지위를 가졌던 통화들이 시대마다 있었다.
세계 최초의 국제 통화는 기원전 5세기경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그리스 은화 드라크마(drachma)다. 이후 13세기에는 이탈리아, 15세기 신대륙 발견 이후에는 스페인 화폐가 국제 통화 지위를 가졌고, 17세기부터 무역과 금융 강국으로 부상한 네덜란드의 화폐 길더(guilder)는 18세기 무렵부터 국제 통화로 사용되었다.
영국은 17세기부터 네덜란드의 앞선 금융 시스템 적극 도입으로 금융 시장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국제 무역을 지배하면서 네덜란드의 길더를 이어 영국의 파운드가 국제 통화가 되었고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축 통화로 발전했다.
당시 각국은 금은 복본위제를 사용하고 있었다. 금은 복본위제는 금과 은의 시장 가격에 따라 서로의 교환 비율이 변하기 때문에 통화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제도였다. 그런데 1816년 영국은 의도치 않은 결과로 금 단일 본위제를 최초로 채택하게 된다.
과정은 이랬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였으며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 뉴턴(Issac Newton)은 1699년 왕립 주조국 국장에 임명되었다. 영국 정부는 1717년 뉴턴에게 금화와 은화의 가치를 책정하고 교환 비율을 정하는 임무를 맡겼다. 뉴턴은 과학자답게 객관적이고 정확한 교환 비율을 정했지만, 시장에서는 수시로 가격이 변했으며, 금 가격은 상대적으로 내리고 은 가격은 상대적으로 올라 버린다. 은화보다 은화를 녹여 은괴로 만들어 원자재로 팔았을 때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게 되었는데, 영국 상인들은 이를 기회로 은화를 녹여 은괴로 외국에 수출해버린다. 결국 영국 내 은화는 고갈되었고 금화만 유통되었다. 이로써 어쩔 수 없이 1816년 은을 배제한 금 본위제가 확립되었다. 이것은 오히려 행운이었다.
영국이 금 본위제로 이행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이었다. 금 본위제는 금화를 중심으로 한다. 그런데 금화는 일상생활에서 통용되기에 가치가 너무 높다는 게 문제였다. 금 본위제가 원활하게 실현되려면 고가의 금화 외에 소액 거래에 사용할 수 있는 동전이 필요했다. 이러한 동전의 금액은 실제 금속 가치보다 높은 가격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동전보다 동전을 녹여 만든 금속 값이 더 비싸다면, 영국의 은화처럼 동전을 녹여 금속으로 팔아 버리는 일이 발생할 것이다.
10여 년 전쯤 우리나라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예전에 사용되던 10원짜리 동전의 원료는 구리와 아연 등의 합금이었는데 구리 값이 오르자 10원짜리 동전을 녹여 상대적으로 비싼 구리 가격으로 팔아 차익을 챙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금속 값보다 더 비싸게 유통될 수 있는 동전이 필요했는데, 그러려면 돈값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금속으로 위조할 수 없는 돈을 만드는 기술이 필수적이었다. 사람 손으로는 위조가 어려운 정교한 동전을 대량으로 만들기엔 한계가 있는 바,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영국의 산업혁명이었다. 산업혁명은 위조가 어려운 동전을 대량으로 만드는 기술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영국 화폐 파운드화의 기축 통화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파운드화는 1899~1913년 전 세계 외환 보유액의 약 40%를 차지하게 된다. 지난 3월 말 미국 달러의 전 세계 외환보유액이 59.5%를 차지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당시 교역 수준을 감안할 때 대단한 수치다. 또한 당시 파운드화를 발행하는 영란은행의 영향력은 지금 미국의 연준보다 훨씬 막강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19세기 말 파운드화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축통화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그 지위는 불과 50년도 지키지 못했다.
기축 통화의 역사를 바꾼 전쟁
영국은 1914년 파운드화의 역사를 바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다. 4년 반 동안 전쟁에서 영국은 승전국이 되었지만 많은 문제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전쟁이었다. 영국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전쟁과는 무관했던 미국은 유럽지역으로의 수출이 급신장했고, 남아메리카 시장을 장악했다. 일본은 아시아 시장을 손에 넣게 됨으로써 상대적으로 영국 무역은 상당히 위축되었다.
영국 지배력이 약해지자 기축 통화의 이점을 누려보고자 하는 각국들의 국제 금융 시장 주도권을 쥐기 위한 견제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행동을 보인 건 미국이었다. 전 세계적인 교역으로 급신장한 경제력은 1926년 전 세계 금의 45%를 보유하기에 이른다. 이를 발판으로 미국은 국제 금융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며 서서히 기축 통화 자리를 넘보기 시작한다.
미국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도 대규모 국제 수지 흑자를 내며 금 보유를 대폭 늘렸다. 영국이 다시 금융 패권을 잡으려는 시도를 보이자 프랑스는 1927년 보유한 파운드를 대거 매도하며 공격했고, 독일 역시 1926년 보유한 파운드화를 대거 금으로 교환하며 파운드화 위기를 부추겼다. 파운드화 가치는 급락했다.
1929년 미국 월가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일시적으로 부활한 영국의 금 본위제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영국은 금 유출을 막기 위해 이자율을 높여 자본 유입을 통한 금 유입 시도를 해보았으나, 고금리는 대출을 안고 있는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켰고, 이어 실업률이 20%까지 치솟자 더 이상 이자율을 높이지 못했다. 파운드화의 가치 하락을 예상한 국제 자본은 더욱 빠르게 파운드화를 투매했다. 영국은 결국 1931년 9월 19일 파운드화의 금 태환을 중단했고 이후 3개월 만에 파운드화는 30% 이상 절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파운드화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국내 경제는 망가져 있었다. 영국의 약해진 틈을 타 식민지들은 속속 독립했고 대영 제국은 점점 기울어 갔다. 파운드화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이 무너질 때의 가장 큰 원인은 늘 내부에 있기 마련이다. 파운드화가 기축 통화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 계기도 영국 내부에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국내 경제 기반 붕괴, 화폐 가치를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려 했던 계획의 실패, 기축 통화 자리를 지키기 위해선 필수였던 다른 국가들의 협력을 얻지 못한 것 등은 파운드화의 몰락을 재촉했다.
한때 세계 최강의 기축통화 파운드화는 유로화 편입도 거부한 채 전 세계 4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국의 파운드화 몰락 과정에서 가장 큰 활약은 당연히 미국 달러였다. 이후 미국 달러는 기축 통화의 자리를 쟁취했지만,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달러 자리를 넘보는 세력들을 견제해야 하는 상황이다.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 등이 다양한 도전장을 내미는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도 체계적인 도전은 중국 위안화인 듯하다.
현재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는 왜 지금 도전을 받고 있는 걸까. 그 자리를 계속 지킬 수는 있을까. 시대가 변했기에 파운드화에 가해졌던 위험과는 사뭇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다음 글은 미국 달러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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