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8일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NC 다이노스와 두산 베어스의 2차전 경기가 있던 날.
대학생 때부터 팬이었던 두산 베어스를 집에서 혼자 열심히 응원하고 있는데 모르는 핸드폰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OO이니?"
핸드폰 너머로 웬 중년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목소리였다. 내 이름을 알고 있고 내가 아는 중년 아저씨는 몇 명이나 있는지 빠르게 생각해냈다. 외삼촌이었다. 엄마와는 종종 통화를 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와는 마지막 통화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외삼촌. 나는 어색함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인사했다. 삼촌은 나의 인사와 안부 물음에 간단히 대답하시고는 금세 본론으로 들어가셨다.
"코로나가 이렇게 말썽인데, 회사는 잘 다니고 있니?"
어떤 의미의 '회사는 잘 다니고 있니?'일까. 코로나에 걸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출퇴근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일까. 아니면 코로나에게 직격탄을 맞은 업계 중 하나인 나의 회사가 아직 잘 돌아가고 있는 건지를 묻는 것일까. 외삼촌과 나는 사회의 크고 작은 이슈를 가지고 안부를 물을 정도의 친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질문의 의도는 후자일 것이었다.
"잘 다니고 있어요."
나는 거짓말로 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해봤자 머지않아 외삼촌의 모든 형제들의 귀에 내가 코로나 때문에 실직한 백수라는 사실이 들어갈게 뻔했다. 삼촌은 이어 자신이 코로나를 얼마나 조심하고 있는지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하신 후 조금의 공백을 두신 후에 두 번째 질문을 했다.
"그건 그렇고, 회사는 언제부터 안나가게 된 거니?"
나는 당황했다. 어떻게 알게 되신 거냐고 물었다. '야 인마, 요즘 세상이 이런데 당연히 알지.'라고 하셨다. 나는 한번 더 당황했다. 세상이 이래서 당연히 알았으면서 왜 방금 전에는 회사를 잘 다니고 있냐고 물으신 건가. 더군다나 세상이 이래서 내가 회사에서 잘렸다는 것을 외삼촌이 당연히 알 리도 없었다. 우리 가족과 몇 안 되는 내 친구들만 알고 있는 사실을 어째서 외삼촌도 알고 있는 것인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외삼촌과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업계는 코로나 때문에 앞으로 계속 힘들지 않니?"
"아무래도 출국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는 계속 힘들 것 같아요."
"그러면 다른 직종으로 취업을 해야 하지 않겠니?"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생각해둔 직종은 있고? 이력서는 넣고 있니?"
구체적인 직종 까지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다. 이력서는 한 군데 넣었으나 연락은 오지 않았다. 6년 동안 한 분야에서만 일을 해왔고 코로나 바이러스의 존재도 몰랐으며 내 직업을 바이러스에게 빼앗길 줄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적성에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스스로 직장인의 신분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이 업계를 떠날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일해왔다. 나름 내 나이에 맞게 쌓은 경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회사를 다니는 동안 이 일이 아니라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안 그래도 그것을 알아내는 게 힘든 와중이었다.
"계속 생각하고 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걱정도 되고 불안하기도 해요."
삼촌은 허허하고 웃으셨다. 그리고는 거의 일대기에 가까운 삼촌의 삶을 나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대학교 시절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 지금의 지위에 오르기 전까지 직종을 몇 번 바꿨는지, 삼촌 역시도 코로나로 인해 타격을 받았지만 어떤 노력을 얼만큼 해가며 이 난관을 극복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사실은 별로 궁금하지 않은 것들을 나는 야구경기 세 이닝이 지날 때까지 '네.', '그러셨구나.'를 반복해가며 들어야 했다.
삼촌은 마지막으로 '너는 젊은데 힘들게 뭐 있니? 걱정할 거 없다.'라는 말을 남기셨다. '네, 감사합니다.'라는 나의 무미건조한 대답을 끝으로 통화는 30분 만에 끝이 났다.
삼촌은 직장을 잃은 서른두 살 나에게 삼촌의 방식으로 위로와 조언을 하기 위해 전화하셨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하지만 위로와 조언을 들은 것 치고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너는 아직 젊으면서 왜 직장을 잃은걸 가지고 힘들어하느냐'는 식의 위로가 속상했다. 그런 위로의 말은 내게 필요가 없었다. 젊은 사람은 직장을 잃어도 힘들어하면 안 되는 것인가?
나도 안다. 고3 수험생 시절에는 수능이 마치 내 인생의 종착지인 것 같았고, 취준생 때는 토익 점수 5점을 더 못 올린 게 그렇게 스트레스였다. 여자는 스물일곱이 지나면 신입으로 취업하기 힘들다는 우리끼리의 근거 없는 괴담(?) 때문에 스물여섯 봄, 여름에는 하루하루 가슴 졸이며 이력서를 넣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질없는 가슴 졸임이었다. 그깟 토익점수가 뭐라고, 여자 나이 스물일곱이 뭐 어때서.
그러니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고충도 내 나이가 마흔이 되면, 쉰이 되면, 아니 당장 내년에라도 다시 떠올리면 아무 일도 아닌 거 가지고 괜히 힘들어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 그 당시에는 아무 일도 아닌 게 아니다. 그 상황을 맞닥뜨리고 있는 그 나이의 나는 당연히 힘들고 고통스럽다. 지나간 일이 아니라 겪고 있는 일이니까. '지나고 나면 아무 일 아니겠지.' 라며 현재 두려운 자신을 스스로 위안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하는'나도 다 겪어봐서 아는데 그건 힘든 것도 아냐.', '넌 아직 어리잖아. 뭐가 문제야?'라는 식의 위로가 힘들다. 그들도 겪을 땐 얼마나 힘든지 알면서 이제 와서 힘든 게 아니라고 아는 체하는 게 불편하다.
그런 말로 위로하고 싶거든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모르는 체 지나쳐 줬으면 싶다. 걱정의 무게와 힘듦의 정도는 저마다 다르다.
젊은 사람도 힘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