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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덕희 Jun 19. 2020

소환 #1

응답하라 1993

가끔 어린 시절이 불현듯 생각난다. 이 기억의 소환은 때를 가리지 않는 편인데 생각이 많아지고 몸이 피곤해지면 어김없이 찾아온다. 더 나이가 들면 하나 둘 잊힐까 두려운 마음에 어디에라도 글로 남겨둬야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하곤 했다. 이 기억의 소환을 앞으로 나는 몇 번이나 읽게 될까. 읽을 때마다 그 빛나던 아름다운 청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되겠지.


내 고향 '홍성' 가는 길


1993년 겨울, 대학 합격자 소식을 들은 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입학하는 3월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학비를 벌 시간은 충분했다. 고등학교 은사님 중에 예식장과 볼링장을 운영하시는 미술 선생님이 계셨다. 내 고향 '홍성'은 한적한 시골임에도 불구하고 시내 중심부에 나름 있어야 할 것은 모두 갖춘 곳이었다. 당시에 볼링 붐이 일던 터라 볼링장은 개장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늘 북적이는 그런 곳이었다.


선생님의 배려로 나는 대학 입학 전까지 그곳 기계실에서 일할 수 있었다. 볼링장의 기계실은 말 그대로 볼링 기계가 돌아가는 레인 뒤편의 공간이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들로 귀가 먹먹할 정도였다. 그곳 기계실에는 두 분의 기사님이 계셨는데 한 분은 천사라 말할 만큼 마음씨가 고운 여린 체격의 사내였고, 다른 한 분은 성격이 좀 까칠한 꽤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다. 지금 내 나이가 되어서 생각해보니 당시에는 두 분 모두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들이었던 것 같다. 도통 이름이 생각나질 않는다. 그때 일기라도 써두었더라면 지금도 그 형들의 이름을 불러보았을 텐데. 아쉽다.


2교대 근무로 돌아가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한 번 근무를 할 때마다 꼬박 24시간을 버텨야 했다. 건물 뒤편에 별도의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아주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이었다. 내가 살던 집에 비하면 신식으로 지은 아파트 정도였을 거라고 기억한다. 숙소에는 밥을 해주는 아주머니가 계셨고 볼링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늘 그곳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볼링장 한편에는 군것질거리를 파는 분식점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볼링 용품을 파는 아주 작은 매장이 있었다. 분식점 사장님은 젊은 여자분이셨고 용품 매장 사장님은 중년의 남자분이셨다. 두 분 모두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던지라 늘 야간 근무가 끝나는 새벽녘에 삼삼오오 직원들끼리 모여 노는 자리에 동석하셨다. 그때의 기억을 소환해보니 '그래, 즐거웠지. 재밌었다.'는 기억이 지배적이다. 고작 19살 풋내기를 같이 데리고 놀아주던 볼링장 직원 형들과 누나들, 분식점 사장님, 매장 사장님이 그립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기계실의 장비들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볼링공이 굴러와 볼링핀에 맞을 때마다 나는 소리는 마치 천둥소리 같았고 10대 정도 되는 기계들이 한 번에 돌아가는 소리는 마치 전쟁이라도 난 듯했다. 정해진 시간마다 볼링 기계의 우레탄 벨트를 마른걸레로 닦아줘야 했다. 손이 들어가기에는 기계 부품들 사이가 턱없이 좁은 공간이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기계 사이로 손가락이 빨려 들어갈 수 있었다. 기계를 멈추고 닦으면 해결될 일이었지만 여건상 그럴 수가 없었으리라 짐작해본다. 기계 정비를 가르쳐 주던 까칠한 기사님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도 그럴 것이 까딱 잘못하면 손가락이 부러지거나 잘려나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정비를 하던 날 사실 나는 무척 겁이 났다. 아니나 다를까 로프에 손을 대자마자 마른걸레가 빨려 들어가더니 이내 손가락도 같이 기계에 빨려 들어갔다. 회전축과 우레탄 로프 사이에 손가락이 끼어 한 바퀴 돌려 나오니 비명을 지를 수도 없이 고통스러웠다. 이러다 정말 내 손가락 중 하나가 잘려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른걸레를 우레탄 로프에 대고 손가락이 빨려 들어가지 않게 있는 힘을 다해 용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몇일만에 요령이 생겨 이후로는 손가락이 빨려 들어가는 일이 줄어들었다.


로프를 닦는 일 이외에 하루에 몇 번씩 모든 레인의 게임을 멈추고 레인 정비에 들어가는 일도 나의 일과 중 하나였다.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레인에 오일을 발라주는 아주 멋스럽게 생긴 기계를 밀던 선배 기사님의 모습이 왜 그렇게 멋져 보였는지 모르겠다. 마치 무대 위에 올라 멋진 춤을 추는 가수 같았다고나 할까? 이왕 하는 일이라면 쇼맨쉽이라도 갖고 해야 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레인에 기름 칠이나 하는 사람이라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면 얼마나 그 일이 하기 싫었을까 생각한다. 처음 레인에 오일을 바르던 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창피해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머릿속에 되뇌었다. 그렇게 레인에 새 오일을 바르고 나면 정말 물 위를 미끄러지듯 볼링볼이 잘 굴러간다. 그런 연유로 가끔 선수들이 센터에 오면 우리에게 따로 부탁을 하곤 했다. 기계실 기사들이 가장 그 일을 귀찮아했다. 어디에나 뇌물과 편의는 존재했다.


기계실 기사들과 무척 친했던 선수가 한 분 계셨다. 볼링센터에서는 종종 공식 경기가 열리곤 했었는데 매번 대회에 참가했던 선수였다. 볼링에서 퍼펙트게임을 치는 건 선수 인생에서 한 두 번 나올까 말까 할 만큼의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골프에서 홀인원을 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매번 스트라이크를 쳐야 하니 쉽지 않은 일이다. 그날은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기계실의 가장 선임 선배가 긴 나무 막대 하나를 가져오더니 그 선수의 게임이 진행되고 있는 레인의 기계 뒤로 나를 데려갔다. 기계 틈 사이로 경기를 보면서 그 선수가 볼을 굴리면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서 볼링핀을 가로막고 있는 고무판을 막대로 밀어주라는 것이었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같이 범죄에 참여하라는 말을 들으면 그 심정일 게다. 볼링장에서 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혹여 그 일을 거부하면 나에게 어떤 불이익이 오거나 그 선임 선배가 나를 괴롭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경기는 아마도 정식 경기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선수가 기계실 선임에게 지시를 한 것인지 아니면 그 기계실 선임이 그 선수를 위해 자의로 한 일인지는 아직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나는 숨죽여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기계 뒤에 숨어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고무판을 밀어댔다. 당연히 그 선수의 게임은 퍼펙트게임으로 기록에 남았다. 아마 퍼펙트게임 기념패도 받았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못된 속임수 게임에 동참했던 것이다. 아직도 마음이 씁쓸한 것을 보니 내내 불편한 기억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굉음 속의 기계실은 웃지 못할 일도 종종 일어나던 은밀한 장소였다.


창문 하나 없었던 어둑 컴컴한 기계실은 낮인지 밤인지도 모를 만큼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책을 보던 TV를 보던 기계실 책상에 앉아 늘 안내센터의 인터폰을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기계에 볼이 걸리거나 핀이 걸리면 어김없이 인터폰의 벨이 울렸다.




나는 이렇게 내 청춘의 첫 번째 기억을 소환해내었다. 지금도 내 귓가에 그때의 인터폰 벨이 울리는 것 같다. 분식점 사장님의 아름답던 미소와 용품 매장 사장님의 멋스러운 모습과 늘 나에게 막내라 부르며 동생 보살피듯 보살펴 주던 센터 직원들과 나에게 한없이 따뜻한 말로 인생을 가르쳐주던 기계실 기사 형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얀 쌀밥에 정성껏 만들어 찬을 내주시던 숙소 아주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려운 형편인 줄 알고 조금이라도 학비에 보탬이 되도록 19살 어린 나를 위해 일자리를 마련해주시던 은사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나는 인생을 배워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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