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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브리엘의오보에 May 13. 2018

지키기 위해서라면

구스타보 론 / My Bakery in New York

구스타보 론 감독의 영화 ‘My Bakery in New York’은 한참 뉴욕 여행기 쓰기에 빠져 있는 내가 ‘자기변호’용으로 선정한 영화다. 뉴욕에서 내가 ‘좋다’, ‘괜찮다’ 느꼈던 객체 혹은 사건을 소재로 글을 쓰다 보니 마치 내가 ‘뉴욕 빠’ 같다. 하지만 난 ‘보스턴 빠’다. 그것도 아주 사소한 일로 ‘보스턴 바라기’가 됐다. 하버드 대학을 살펴보고 나와 인근 동네를 걸어다니다 만난, 여름 햇살 가득 받던 그 집. ‘아! 살고 싶다’란 생각이 들면서 보스턴 팬이 됐다. 물론 하버드 대 설립자 동상의 신발을 만지며,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은 우리 아이가 ‘하버드 대학에 다닌다면…’이라고 생각을 한 직후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동상의 인물이 실제 설립자는 아닌데도,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신이나 신화에 기대듯, 그런 마음이 들어서 보스턴에 애정이 생긴지도 모른다. 사실 내 성격이라면 보스턴을 과연 좋아했을까? 하지만 그 외견은 애정이 생기기에 충분했다.


뭐 어쨌든, 이 영화는 수 십 년 동안 애정을 가지고 ‘사람’을 중요시하며 사랑을 쏟아왔던 베이커리를 남기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이모로부터 사건은 시작된다.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25만 달러의 빚도 불사한 이모의 애정에 감복했는지 두 사촌 자매는 베이커리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여기까지가 이 영화의 발단이다. 그리고 앞으로 할 내 이야기의 주제이자 소재다.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생후 1년이 되기 전에 서울로 이사, 지금부터 7년 전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아버지의 전근이 계기였다. 청계천 아파트에서 살았던 사진이 남아 있다. 그 아파트가 불이 나고 우리는 성동구로 왔다. 거기서 대학을 마치고 직장 생활을 하던 중 강동구로 이사한다. 2년 후 전세 상승으로 용인시로 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로 이사하고, 수도권으로 이전해 생활하는, 도시 전문가다. 익숙해질 만도 하지 않을까? 성동구의 그 동네는 변두리였다. 동네 한복판으로 개천이 흘렀고, 그것이 개발되어 점점 도시의 모습을 갖추는 모든 과정을 봤다. 개천이 복개천이 되고, 자동차가 늘고, 동네 주민이 늘어났다. 동네엔 마음 놓고 놀 공터가 사라졌고, 초등교 시절 뒷산에 오르던 일도 중고등학교 경쟁 속에 그만두게 됐다. 물론 약수터는 운동 삼아 격주 혹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부모님과 함께 올랐지만. 동네에 산이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점은 없다. 산에 오르는 사람의 수가 늘고 낮은 구릉 위 발 디딜 틈이 줄어든다. 팔각정이 생기고 약수터 옆에는 운동 기구가 들어섰다. 도시 속 산의 모습이다. 시장 앞은 어땠나? 단독 주택이 띄엄띄엄 있던 동네에 다세대가 들어서고 골목을 집과 작은 상점, 방앗간이 빼곡하게 매웠다. 골목은 양쪽으로 주차한 차들로 차도 사람도 조심하며 지나야 했다. 공기는 점점 탁해졌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지하철이 새로 생겼다. 대중교통 노선도 늘어났다. 강남에서 술 한 잔 걸치고 동네 이름을 말하면 택시 기사 아저씨가 길 모른다는 소리를 하지 않게 됐다. 한 반에 60명 이상이었고, 한 학년에 10개 이상의 반이 있었다. 입학식과 졸업식에 학생과 하객이 넘칠 만큼 왔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뒤지지 않으려는 노력도 가속화됐다. 서울 한복판에서, 강남에서 일을 할 때 역시 경쟁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학교에서의 경쟁은 동네가 그 범위이지만, 직장에서의 경쟁은 서울 시민에 수도권 주민까지 더해진다.


햄스터의 일상 중 쳇바퀴를 돌리는 시간은 10%도 안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쳇바퀴에 올라 열심히 달린다. 햄스터도 근육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젖산도 생길 것이고 다리도 아플 것이며 호흡도 가파질 것이다. 학교 혹은 직장 생활의 일상은 쳇바퀴 돌리는 시간이 최소 일과 시간의 80% 이상이다. 더욱이 인간의 쳇바퀴는 정신적 쳇바퀴다.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피로는 정신력으로 이길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말은 거짓말에 가깝다. 분산된 힘을 끌어모아 한 번에 사용하면 하루 혹은 이틀 동안 무기력에 빠진다. 햄스터가 쳇바퀴를 돌리다 내려오는 것처럼, 인간은 멍 때리기, 여행 가기, 레저 즐기기, 취미 생활하기, 밀어 두었던 친지와 말다툼 하기로 정신적 쳇바퀴에서 벗어난다. 나는 도시 생활 속의 경쟁과 복작거림이 끝도 없이 이어질 거라 생각하게 됐고, 매너리즘에 빠졌고, 휴직을 하고 뉴욕으로 떠났다. 긍정적으로 ‘휴식’이며, 부정적으로 ‘도피’다. 그렇게 숨을 돌려야 다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바쁜 일상 속에 있어서 그런지, 내가 생활했던 도시(서울, 용인, 간혹 분당)에서 ‘와, 이런 곳도 있네!’라고 느낀 순간은 시간도 짧고 빈도도 적었다. 지나가는 눈길로 본 것이 잠재의식을 통해 기억되어 있었나 보다.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뉴욕에서 ‘이국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상기하지 못한 장소와 동일한 데도 뉴욕의 그것에 ‘이국적이다’라고 느꼈는지도 모르지만.


영화 ‘My Bakery in New York’으로 돌아가 보자. 주인공과 그 사촌은 이모의 베이커리를 사랑한다. 이모가 잘 운영하고 있던 베이커리는 자주 갈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는 동네 사람들과의 따스한 관계도 있었다. 주인공은 구두 닦기 할아버지와 이런저런 일상을 나눌 만큼 친근하다. 야구 이야기가 나오면 진지해지는 아저씨의 모습도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그런 아저씨를 보고 ‘또?’라는 표정을 짓는 동네 사람들도 어제오늘 알게 된 사람은 아니다. 베이커리를 중심으로 뉴욕 한 켠에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다. 베이커리의 안 좋은 점을 온몸으로 막고 있던 이모가 돌아가시자, 이모집은 이미 은행으로 넘어갔고, 베이커리를 영업을 지속하지 못할 경우 은행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이 붓물 터지듯 밝혀졌다. 그 복작거리는 뉴욕에서 오랜 세월 좋아하는 빵과 관계의 장소를 지키기 위해 이모는 25만 달러의 빚도 졌다. 그러나 언제나 웃는 얼굴로 대하던 이모. 사촌 자매는 이 베이커리를 지키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다.


여행지는 일정량의 금액을 손에 쥐고 가서 며칠 동안 노동의 그늘에 들지 않고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고 오는 장소다. 따라서 ‘살고 싶어’지는 순간이 생긴다. 여기서 살면 이 햇살과 광경과 사람들을 매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모는 그 햇살과 광경과 사람들을 매일 보기 위해 노력에 노력을 쳇바퀴 돌듯 했다. 나 역시 뉴욕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한 달 예상 생활비를 뽑아 보고, ‘얼마 정도 벌면 여기서 살 수 있겠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활 정보지(우리나라의 경우엔 ‘벼룩시장’ 같은 정보지)를 살펴보기도 했다. 혹시 내가 가진 경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싶어서.



그런데 오래 보진 못했다. 이유는 여기에 있다. 뉴욕의 엘로 캡(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말한다. 차가 출발했고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 내가 하려던 말은 ‘저기 세워 주세요’였다. 우리나라 택시에서 흔히 하는 말. 그래서 “Stop there, please.”라고 했더니 엘로 캡은 급정거를 했다. 어찌어찌 택시를 내리고 회화 실습을 위해 입을 다물고 있던 아내가 뭐라 한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Would you pull over there?”라고 말하고 자연스럽게 내렸다.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16년 동안 영어를 함께 했고, 4년 이상 영한 번역을 했던 내가 할 수 있는 회화. 생활 정보지에서 내 경력과 맞는 곳을 찾는다 하더라도 과연 업무 진행이 될까? ‘Stop there!’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pull over there’가 맞는 표현이다. 내가 공부한 문법책과 reading 교재의 예문은 정말 수준 높은 혹은 마케팅 홍보지 같은 문장들이었다. pull over there를 발견한 것은 뉴욕 올 때 가져온 개인 학습용 회화책 앞부분에서였다. 나는 과연 20년 동안 어떤 영어를 해 온 것인가? 만일 회화, 외화 중심의 영어 공부를 했다면, 나는 그때 ‘pull over there’라고 하지 않았을까?


영어 교육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뉴욕으로 장기 체류를 올지 몰랐다고 변명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영어를 공부할 때 그 목적지로 무엇을 그리고 있었나 상기해 보는 것이다. 덕분에 요즘 초등교 딸이 영어 단어를 외울 때는 이런 잘난 척을 한다. ‘Attract는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들다란 의미야. 유혹하다로 만 외우면 안 돼. 알겠지?’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해외의 문물을 알기 위해서라는 목표도 있겠지만, 기본은 ‘소통’이다. 말로 글로 ‘소통’하기 위해 상대의 언어를 배운다. 따라서 최근의 초등학교 영어 교육은 적어도 우리 때보다는 나은 것 같아 안심은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 과목의 첫 수업에서 ‘우리가 왜 영어를 배워야 할까요?’라고 서두를 시작하고 ‘소통’을 말하는 교사는 몇 명이나 될까? 조금 더 덧붙이면, ‘내가 이렇게 설명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 아이들은 몇 명이나 될까?’라고 생각하는 교사는 또 몇 명이나 될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영어를 왜 공부해야 할까?’라는 자문을 아이들이 스스로 하도록 유도하는 부모와 교사는 얼마나 될까?


생활 정보지까지 살펴보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서울과 뉴욕의 공통점은, ‘일상을 유지하고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든 정신적 쳇바퀴를 돌아야 하고, 내 역량이 부족한 만큼 휴식 시간을 줄어든다’인 것 같다. 뉴욕의 회사원들 중에도 나처럼 매너리즘에 빠져 LA에 장기 체류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보스턴에도 있을 것이다. 여행자인 나는 어쩌면 일상을 옆에서 보는 제3자 혹은 관찰자의 입장이다 보니, ‘아, 여기 회사원들의 점심시간은 11시부터 2시네. 좋겠다’하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돌릴 수 있는 것이다. 뉴욕 베이커리의 이모처럼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빠진 듯 고민하고, 행동해야 웃으며 찾아오는 조카와 사람들이 서로 만날 장소를 유지할 수 있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 치열한 곳이다. 여행자이기 때문에 여유로움과 한가함을 즐길 수 있고, 정신적 쳇바퀴에서 내려와 ‘지금 난 사람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생활정보지까지 찾아본 것은 나의 섣부름이었다. 물론 그 섣부름에 치열함을 더하면 ‘다른’ 세계의 문을 열고 첼시 마켓으로 놀러 가고, 벼룩시장을 거닐며, 공원 피크닉을 하는 등의 휴식이 전개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원하는 것을 구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쳇바퀴에서 보람까지 느껴야 한다. 보스턴의 그 햇살 가득한 집을 내 집으로 하려면 물론 더 큰 성과를 쳇바퀴에서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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