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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브리엘의오보에 Apr 26. 2020

음악, 듣고 있다

마디마다 혹은 앨범마다 소리 크기를 줄인다. 


언제나 음악만 듣는 경우는 거의 없다. 조리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작업을 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음악을 튼다. 화이트 노이즈 White noises일 수 있다. 독서의 경우 매번 다르다. 음악을 틀지 않고 집중하는 경우도 많다.


음악을 듣는 방식은 매번 다르다. 신곡 리스트를 살펴보면서 즐겨 듣는 가수를, 관심이 가는 곡을 앨범 단위로 혹은 곡 단위로 재생 목록에 넣어 듣는다. ‘듣고 싶네’하는 가수의 대표곡 플레이리스트를 무작위로 듣는다. 인기곡 중 손이 가는 곡을 재생 목록에 넣어 듣는다. 혹은 ‘DJ’로 자칭 혹은 명명된 사람들의 주제별 추천 음악 리스트를 튼다. 음원 서비스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브랜디드 아티클 branded article의 소개 음악을 듣는다.


음악을 듣다보면, 다음 마디가, 다음 곡이, 다음 앨범이 재생되면서 소리가 커지는 경우가 있다. 놀람과 기억 상기가 동시에 일어난다. 내가 볼륨을 키운 적이 있던가? 대부분 중간에 볼륨을 높이는 경우는 희박하다. 각 곡마다, 앨범마다 녹음 환경과 녹음 소리 크기의 정도가 다르겠지 하고 생각한다. 때로는 ‘튀는 음색’의 가수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 나에게는 음악을 듣는 소리 크기의 하한가와 상한가가 정해져 있는 모양이다. 장르별로, 곡의 모습별로 볼륨을 더 크게 하는 경우가 희박하지만 존재한다. 그러나 대부분 이 적용 범위를 벗어나는 경우는 잘 없다. 그런데도 갑자기 소리가 커지는 경우를 만난다.


음악 소리와 관련해서 이런 조정도 한다. ‘아! 이 가수는, 이 가수의 이 곡은, 이 곡은 이 소리 크기로 들으니 좋다!’ 조리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작업을 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아!’ 싶을 때 소리를 조정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소리 크기 조정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커지는 (혹은 그렇게 느끼는) 경우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곡을 듣다가 스스로 조정하는 경우이다. 변하지 않는 규칙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듣는 편이다.


‘진정으로 감동적은 곡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든 내 집중력을 빼앗는다’라는 체험 판단 기준이 있다. 화이트 노이즈에서 ‘음악’으로 들리기 시작하면 재생 화면을 캡처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플레이리스트에 등록한다. 나의 플레이 리스트는 연도별로 구분되어 있다. 대부분 그 곡을 들은 연도별로 등록한다. 신곡 리스트를, 인기곡 리스트를, 추천곡 리스트를 보다가 ‘들어보자’ 싶은 앨범은 ‘Try’ 플레이리스트에 등록된다. 그리고 이동 중에, 혹은 일상 중에 ‘오늘은 듣자’ 싶은 날 재생한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곡은 방금 이야기한 대로 ‘캡처 > ’좋아요‘ > 플레이리스트’의 시퀀스 sequence를 탄다.


곡을, 앨범을 선택하고 싶지 않으면, 저장된 플레이리스트를 무작위 방식으로 재생한다. 신기한 것은 무작위 순서로 재생되는 음악이 마치 한 몸처럼 분위기가 연결된다. 장르가 다름에도 그렇다. 어떤 곡은 K-Pop, 어떤 곡은 미국 팝, 어떤 곡은 R&B, 어떤 곡은 Alternative. 필자 개인 취향이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본인이 한 일에 신기함을 느끼는, 흔하지 않은 체험이기도 하다.


- 소리 크기를 조정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소리가 커지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 플레이리스트를 무작위로 재생하는데 분위기가 한 몸처럼 연결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 화이트 노이즈 상태에서 내 귀와 관심을 주목시키는 곡은 전문가적 ‘좋은’ 곡인가, 아니면 내 취향인가?


요즘은 반드시 그렇지 않지만, K-Pop에 감동이 폭발하는 지점을 갖지 않는 곡이 있다. 해외 음악, 특히 미국 혹은 유럽 대중음악에 감동이 폭발하는 지점이 있는 곳이 있다. K-Pop의 경우는 그 수가 많아지는 경향이고, 미국 혹은 유럽의 경우는 예전부터 있던 경향이다. 대부분 하이 노트 High Note가 구성된 곡이다. 음악의 시작부터 감정을 모아, 하나로 뭉쳐, 한 번에 폭발시키는 음악. 이별 후, 외로울 때, 쓸쓸할 때, 미련에 흔들릴 때 이런 음악에 끌린다. 그래서 모아두고 그 기분에 맞춰 들은 적도 있다.


기분을 내고 싶을 때, 드라이브를 할 때 템포, 그루브, 비트가 있지만 BPM 100 내외인 음악을 즐긴다. 최근 자주 듣는 음악은 BPM 104의 The Weeknd ‘Can’t Feel My Face’이다. 이 이상 빨라지면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 것 같다. 이 정도의 BPM은 나를 기다려 주는 것 같다. 곡의 구성도 처음 부분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에 도달하는 구간은 나에게 예열할 기회를 주는 것 같다. 약간 감성적인 된 나를 현세로 끌어 올려주기도 한다. 잠시 리듬에 집중하게 해서 기분 전환이 된다.


필자는 ‘클래식은 안정된 화성을 가지고 있고, 대중음악은 감정을 자극하도록 안정되지 않은 화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한다. 이 이상의 의미도 숨겨진 의미도 없이, 글자 그대로의 생각이다. 클래식을 이론적으로 파고들지 않는다. 다만 손을 뻗어 명반을 찾고 있긴 하다. 가장 좋은 것을 접해야 이후 체험에 대한 판단 기준이 생긴다고 필자는 믿는다. 전문가만이 아니라 애호가들이 ‘이것은 명반’이라고 말하는 음반을 음원 서비스에서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 들을 수 없지만 명반을 찾아 듣는다. 


지휘자, 연주가, 작곡자가 명반 여부의 기준이 되는 것 같다. 간혹 클래식 이야기를 하는 작가들이 말하는 히든 음반 Hidden Album을 듣기도 한다. 최근에 들은 앨범이 Teodor Currentzis의 Beethoven: Symphony No. 5 in C Minor, Op. 67이다. 다행히 좋게 느꼈다.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아직 자신감이 부족해서다. 그래서 개인의 범주로 표현한다. 클래식이든 어떤 분야든, 잘 모를 때는 가장 좋은 것을 체험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되는 모양이다. 이론 학습에 대한 거부감은 없지만, 적어도 예술 분야는 머리가 아니라 귀로 듣고 싶다. 예술의 범주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어 진다는 말도 인정한다. 물론 예술 분야만이 아니지만.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 오후 4시까지 계속 음악을 듣고 있어서 이런 글을 쓰게 된 모양이다. 플레이리스트 Try의 곡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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