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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브리엘의오보에 Sep 24. 2017

건강한 집밥

유명한 요리 교육기관의 교수들은 학생들이 조리한 음식을 맛본다. 그들이 그 시점에 맛을 판단하는 기준은 자신의 입맛이 아니다. 요리 교육기관이 학생들에게 전하는 것은 기술이다. 물론 ‘요리인의 마음’도 중요한 교육 영역이다. 


요리 교육기관이 학생들에게 전하는 기술이란, 대중에게 제공하는 요리를 조리할 때 필요한 기술이다. 요리 교육기관을 수료한 학생들은 다양한 형태의 레스토랑 주방에 서게 된다. 누군가는 오너 셰프로, 누군가는 조리원으로. 그들이 수료 후 조리한 요리를 제공하는 대상은 대중이다. 한 사람만을 위해 요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여러 사람들을 대상으로 요리를 제공한다. 그러기 위해 조리를 한다. 


한 사람을 위해 조리를 하든, 여러 사람들 대상으로 조리를 하든, 그들은 맛이라는 영역에서 만족이란 성취를 얻으려 한다. ‘아, 맛있어’하며 얼굴에 잔잔히 혹은 격렬하게 퍼지는 미소. 그리고 그 미소 뒤에 찾아오는 만족감. 그것을 행복 Happiness이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만족인지 행복인지를 결정하는 과제는,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수행할 필요는 없다. 세상은 각자가 느낀 결과가 모여 트렌드를 형성하는 곳이므로. 만족으로 느끼는 사람이 많다면 만족이고, 행복이라 판단한 사람이 많으면 행복이다.


소설, 만화, 영화에 나오는 멋진 요리사들은, 자신의 요리를 먹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힘을 얻는다고 한다. 그런 얼굴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요리인의 행복은 커질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조리실로 출근을 한다. 들어온 식자재를 점검하고 가려 낸다. 신선하면 ‘오늘의 요리’로 할까 생각도 한다. 점검을 통과한 식자재를 다듬어 보관하고 오늘 조리할 메뉴들을 살펴본다. 오늘 식수인원을 예상하고, 메뉴별로 필요한 재료들을 조리에 맞게 손질한다. 손질된 재료들을 조리대 용기에 구분하여 넣는다. 홀의 청소는 끝났다. 오전 11시. 자, 시작이다.


레스토랑에는 2~3 페이지 정도의 메뉴판이 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찾는 메뉴는 한정된다. 손님들이 주로 찾는 메뉴들을 하루에 십여 접시에서 몇 십 접시를 만들어 낸다. 여러 개의 프라이팬이 반복해서 돌아간다. 코스 요리라면, 조리실 내 조리원들이 각자 맞은 부분을 하루에 몇 십 번씩 만든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9시 혹은 손님이 나갈 때까지 동일한 과정이 반복된다. 매일 비슷한 근육이 사용된다. 근육에 젖산이 쌓인다.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2~3시간 정도 휴식시간 break time이 오면, 아픈 팔을 두드리며 잠시 휴식을 하고 저녁 메뉴에 맞는 식재료를 다듬거나 빈 식재료 통을 채운다. 그런 날이 1주일, 1개월, 반 년, 1년, 3년 무수히 반복된다. 그들은 단지 먹은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을 위해 수십 번 프라이팬을 드는 것이 아니다. 생계를 위해 프라이팬을 든다. 그렇지만 간혹 만족한 얼굴을 보면, 좀 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라면, 셰프에게 치하하고 싶다는 손님과 잠시 대화를 하고 나면, 그들의 근육에 쌓인 젖산은 활력을 주는 아드레날린으로 변한다.


매일 아침 떨어지지 않는 눈을 비비고 일어나 조리실로 향하는 것은, 생계를 위해서 일 것이다. 이런 인간의 기본적인 생계 욕구 충족을 위해서라도, 그들은 근육이 피로하고 인대가 늘어나도 칼질을 하고 프라이팬을 휘두른다. 그들의 아픈 어깨와 팔뚝 근육의 피로에 잘 듣는 특효약은 먹고 나서 사람들 얼굴에 피어오르는 만족감이다. 


요리 교육기관의 교수들이 학생들이 조리한 음식을 맛본다. 그들이 그 시점에 맛을 판단하는 기준은 자신의 입맛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맛있다고 할 맛이다. 교수들은 수십 년간의 경험으로 이 기준을 갖게 됐다. 여러 가지 재료가 여러 가지 조리법으로 조리되어 하나의 음식을 만든다. 그 음식을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으면, 여러 가지 맛이 어울려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맛을 만들어 낸다. 감자가 덜 삶아졌다든지, 당근이 설탕에 들 조려졌다든지, 레어로 구운 고기의 내부 온도가 맞지 않는다든지라는 판단은 그 기준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교수들의 혀가 절대미각을 가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단지 그들의 두뇌 속에는 수십 년 쌓인 경험이 하나의 기준을 만들고 있다.


미식가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맛있는 음식을 먹길 바란다. 맛있는 음식이란, 교수들이 가진 맛의 기준을 느낀다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 기준 이하일 수 있고, 그 기준 이상일 수 있다. 비유를 하자면, 교수의 맛 기준이 30cm 자의 15cm 위치 옆에 그어진 가는 직선의 두께 정도라면, 여러 대중이 느끼는 맛있는 음식이란 그 15cm 옆에 여러 번 그어진 두꺼운 직선의 두께 정도일 것이다. 


지금까지 기술한 바에 따르면,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느끼려면 가능한 15cm 옆에 표시된, 가는 직선에 가까운 맛 혹은 그것을 느낄 수 있는 혀 상태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매일 일이 많던 적던 하루 8시간 이상을 노동 활동을 한다. 때로는 바빠서 점심을 거르기도 한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시간 간격이 짧아 아침을 거르는 사람도 많다. 거기에 야근, 철야 아니면 회식으로 알코올에 절은 혀를 갖게 된다. 거기에 흡연까지 한다면 그 혀는 15cm 위치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소위 맛집의 음식을 찾고 추천도 하고 반복해서 방문하기도 한다.


이미 성인의 반열에 있는 내 혀는 그럴지라도, 우리 아이들의 혀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에게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만족이든 행복이든 느낄 기회가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15cm에 아이들의 혀의 미각을 맞출 방법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도 않다. 만화 ‘신의 물방울’을 보면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다양한 맛 경험을 시킨다. 가죽 벨트의 맛을 보게 하고 잡초를 씹게 한다. 다양한 향도 맡게 한다. 그 과정은 표준적인 맛 기준을 활용해 개별적인 맛을 기억하게 하는 과정이다. 미각이 예리하다던가 민감하다던가는 타고나는 부분이라 하더라도, 탄수화물을 철판에 구웠을 때의 맛, 지방을 직화했을 때의 맛, 단백질이 조리 과정으로 변성된 맛, 야채와 과일의 미네랄과 비타민, 당분이 작용한 맛 등 개별적인 혹은 복합적인 맛을 구별해내는 것은 기억을 채우는 훈련 덕분이다. 남들보다 짜다, 달다, 시다, 맵다, 쓰다를 명확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종종 발견된다. 그러나 그것이 탄수화물이 과하게 조리되어서 그런 것인지, 비타민과 미네랄이 물에 씻겨 빠져나가서인지 구별하는 사람은 흔하게 만나지 못한다. 그것은 식별할 수 있는 맛 기준 기억을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의 물방울’ 주인공이 받은 훈련은 목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다만 맛있게 음식을 먹는 경험이면 된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 맛있어서 얼굴에 만족이나 행복이 피어나면 된다. 그러니 이런 훈련은 필요 없다. 알코올과 담배를 적당하게 하고, 가능한 몸이 피로하지 않게 하고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런 달인이 되는 맛 능력을 아이들이 갖게 하자는 말이 아니다.


아이들이 제일 처음 입에 대는 음식은 모유이다. 경우에 따라 시판 분유를 더 오래 먹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그리고 이유식. 이것도 집에서 만든 이유식도 있을 것이고, 믿는 브랜드의 이유식일 수도 있다. 그리고 밥을 먹기 시작하면 우선은 집밥이다. 몇 년 동안 집밥을 먹은 후, 급식을 실시하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경우 단체 급식을 먹게 된다. 그 사이 외식도 여러 번 할 것이다.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고, 이도 저도 입맛에 맞지 않아 매점에서 사 먹거나 편의점에서 사 먹는 등 다양한 식경험이 쌓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아침저녁을 제외하곤 식당에서 먹을 것이다. 학식이든 레스토랑이든 패스트푸드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알코올이나 흡연의 기회가 확 늘어난다. 그 사이 일반인들의 혀는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고 강한 혀와 약한 혀, 전체적으로 약한 혀나 부분적인 요소에 약한 혀 등 다양한 혀가 만들어진다.


집안 교육의 결과이든 자신의 의사 결정이든 자신의 건강 관리에 힘을 쏟는 사람들이 있다. 현재는 그 인구가 많아졌다. 그러나 제대로 된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 혹은 이상한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 등 그 유형은 다양하다. 여기서도 개인의 건강은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지 못한다. 태어날 때 어버지에게 절반, 어머니에게 절반의 유전자를 받고 태어난다. 그 유전자를 통해 유전병을 전달받기도 한다. 질환은 아니더라도 특정 신체 기관이 약하거나 강하거나, 특정 영양소 혹은 음식을 잘 소화하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하는 개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런 차이를 다 알기엔 우리 주위의 의학 기술은 충분하지 못하다. 증상이 나타나야 알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다. 증상을 통해 알았든 사전 검사나 다양한 활동에서 관찰됐든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소위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자기 관리를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현실은, 대중매체를 통해 노출되는 수많은 성공 신화를 따르는 following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부작용, 효과 없음을 겪게 된다.


인간은 타고난 선호도가 있고, 경험으로 만들어지는 선호도가 있다. 그래서 부모가 아이들에게 이것이 옳은 길이야 저것이 옮은 길이야라고 말을 해도 그 선호도의 방해를 받는다. 이미 겪고 나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아이들은 젊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아이들도 많다.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들도 많다. 실패를 하고는 부모가 말한 길로 들어서는 아이들도 많고, 처음부터 그 길을 걷는 아이들도 많다. 부모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도 그것이 아이에게 맞는 경우도 많고 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아이들이 느끼게 하고 싶은 소망은 멀기만 하다. 이런 수많은 잔소리 속에서는 부모 자식 간에 불화만 생겨날 것이다. 언제나 교훈은 잔소리로 전달되지 않는다. 잔소리란, ‘이 말에 따라’라고 말을 하고 따라오는지 여부를 관할하는, 비교적 쉬운 방법이라 많은 사람들이 사용한다. 그러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은, 자유민주주의 이념 하라는 전제로 보면, 의식주의 기술이다. 의와 주는 생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어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할 것이다. 옷을 짓고 집을 만드는 기술을 익히는 것은 비 효율적이다. 그러나 옷을 수선하고 집을 수선하는 기술은 틈틈이 배워두는 것이 불필요한 비용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다. 남의 손을 빌리더라도 제대로 고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식이다. 홀로 살든, 가족을 이루며 살든 누구나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되도록 건강하게 먹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리 기술은 배울 필요가 있다. 맛의 기준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대량생산되는 이유식에 아이의 생명이나 건강을 맡기는 것보다, 내가 틈틈이 조리 기술을 배워 건강한 이유식을 만드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다. 건강한 식사를 만드는 방법은 건강한 식재료를 선별하는 눈을 갖는 것, 각 식재료의 맛과 영양을 최대한 끌어 내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마치 미국의 유명한 조리 교육기관을 나와야 한다는 말로 들리겠지만 그렇지 않다.


맛있고 건강한 음식점을 찾아, 피로해진 혀로 최대한 맛을 기억한다. 그리고 수많은 책과 인터넷에 올라온 수많은 레시피를 참고해 식사를 준비한다. 그리고 가족들의 얼굴을 본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본다. ‘아, 맛있다!’란 한 마디를 듣기 위해 노력한다. ‘엄마, 밥 줘’ ‘아빠, 밥 줘, 배고파’라는 말이 아이들에 입에서 나온다면, 직장 일로 조리 기술을 익히느라 피곤해진 어깨도 활력을 얻지 않을까? 아이와 말이 통하면서 시작한 잔소리는 접어 두자. 그렇게 노력을 하고 무언가 이루어 보자. 그러면 그 손맛이 아이를 통해 손자에게 전해질 것이다. 오이를 먹기 좋게 써는 내 뒷모습이 내 아이의 뒷모습이 될 것이다. 내 손자의 뒷모습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한 집의 전통과 문화는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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