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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성한 Feb 26. 2020

정직원이 되다

호주 멜번에 사는 한 버스기사의 삶 이야기

이 회사에 입사한지 6개월이 넘었다. 이제 정식직원이 된 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회사에서 너 내일 나오지마 하면 그냥 일자리를 잃는 신분이었지만(물론 그런 경우는 없다고 한다), 정식 직원의 신분이 된 이제는 어지간히 큰 실수를 하지 않는 다음에야 일자리를 잃을 일이 없다. 큰 실수라 하면, 술기운이 남은 채로 출근을 한다던가, 승객을 무참하게 폭력적으로 대한다던가, 여튼 아무 생각 없는 근무태도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 돈카스터(Doncaster) 차고지를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는 이 회사가 그 운영권을 빼앗기고 다른 회사가 운영을 하게 되어도, 정식 기사가 된 나는, 그 바뀐 회사가 지급할 새로운 유니폼을 입고 계속 같은 근무를 하면 된다.


내가 일하는 곳은 버스기사만 300명이 넘게 있는, 멜번에서 아니 어쩌면 호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차고지 중에 하나이다. 그러다 보니, 나름의 기사들을 관리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 중의 하나가 Seniority List이다. 한국말로 번역해보자면 '고참순서표' 정도가 될 거다. 내가 입사할 때 나는 이 리스트에서 314번이었다. 내 위로 313명의 선배 버스기사가 있다는 것이다. 6개월이 지난 지금 나의 번호는 303번이다. 선배기시 11명이 그만두었다는 의미이다. 나이가 들어 그만둔 경우도 있고, 개인적인 사고로 그만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위에 말한 것처럼 중요한 물의를 일으켜 일을 그만둔 경우는, 내가 아는 한에서는 없다. 이 리스트가 가장 치열하게(?) 애용될 때는 쉬프트, 그러니까 자신의 스케줄을 정하는 시기이다. 모두들 아침 일찍 시작하여, 오후가 되자마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근무를 선호하는데, 그런 스케줄은 고참순위 100번 안에는 들어가야 어떻게 시도해볼 수 있다. 나처럼 300번대에는 그냥 남는 스케줄(어떤 이유로든 아주 인기 없는 스케줄)을 가져가거나, 아니면 내가 그런 것처럼 릴리프 기사, 쉽게 표현하여 땜빵 기사로 남게 된다.

내 번호 아래로도 열명 정도가 있다. 한때 스무 명까지도 있었지만, 다시 들어오고 그만 두기를 반복하면서 열명 내외를 유지하는 듯하다. 버스기사라는 일이 정말 안정적이긴 하여도, 처음 일을 시작하고서 몇 달은 상당히 고달픈 일이기도 하다. 육체적으로 힘들어 그만두는 사람도 있고, 나는 결국 대형사고 낼 것이라는 우려가 있어 그만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와 함께 입사한 기사 중에 한 명은 버스정류장 가까이 붙어있던 나뭇가지를 보지 못해 버스 왼쪽 상단부를 망가뜨렸고 다음날로 바로 그만두었다. 꽤 많은 노선이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주거지역을 지나니, 어느 정도의 숙련되기 전 까지는 좀 무섭기도 하다. 하긴, 며칠 전에도 선임 기사 하나가 왼쪽 사이드미러를 날려먹었으니...

요즘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내가 지금이라도 버스기사가 된 것을 많이 축하해주고 한편 부러워한다. 상황이 허락되는 한 죽는 날까지 할 수 있는 일이니 더더욱 그렇다. 실제로 칠순이 넘은 선배 기사들이 수두룩하고, 나의 후배 기사들 중에서도 50대가 넘는 나이로 들어온 새내기도 있다. 요즘같이 직장을 떠나는 것이 본인의사와 관계없는 경우가 대부분인 상황에서는 분명 좋은 직업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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