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무리부터 쓰고 진행하는 이상한 이야기
어쩌면 이 부분의 기억이 가장 생생하니 이것부터 쓰는 게 옳은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2019년 10월부터 시작한 일본 생활은 2020년 12월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때 그 자체를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하다. 놀자고 하면 즐길만한 것들이 많았지만, 그 모든 것을 압도할 정도로 나는 탈출에만 목매고 있었다. 그렇게 목맨 탈출을 위한 행동들이 노는 것을 덮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을까. 그때의 나는 열심히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의 개념을 잘 익히지 못했던 듯싶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좀 더 잘 사는 삶을 생각하며 방향을 정해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어쨌든 커다란 얘기는 잠시 뒤로하고 일본 생활을 마무리한 그 순간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나는 공유 하우스에서 살았다. 나름 굉장히 합리적이며 외국인 친화적인 척하며 영어를 잘하는 척하는 그런 회사의 공유 하우스에서 살았다. 척이라는 말밖에 쓸 수 없는데, 일본인 특유의 답답함, 비겁함, 아마추어 주의가 혼합되며 나의 화를 돋운일이 여러 번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증금 환급 지급 과정에서 본인들의 실수로 나에게 두 번 입금을 하고 나보고 처리하라고 연락이 그렇게 많이 왔었다. 내가 필요할 땐 그렇게 모른 척하더니. 섬나라 놈들이란. 후에 이로 인해 좀 일이 있었지만 친구를 통해 원만히 해결했다.
집은 내가 직접 청소해야겠다. 이게 원칙이라고 하는데, 최근 귀국한 친구도 본인이 정확히는 업체를 불려 청소했던 것을 보면 일본에선 그런 게 일상인 것 같다. 내가 몇 개 부숴먹었던 것 같은데 퇴거 청소 검사자는 별말 없이 넘어갔던 것 같다. 사실 그냥 파일철 하나 들고 일하는 척 하지만 난 얘네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청소는 하루가 꼬박 걸렸고, 그 덕에 분리수거 날을 약간은 무시하고 조금은 무단투기를 하고 나왔다.
집에서 자주 마주쳤던 할머니와 인사를 했다. 그녀가 언젠가 나에게 국적을 물어봤고, 나는 중국인이라고 답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하는 데는 별 이유는 없다. 그냥? 어쨌든 할머니는 그걸 믿었는지 말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후에 국적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은 없다. 그 전까진 뭔가 다시 보자는 뜻의 인사를 하던 할머니였지만, 마지막임을 알았는지 "사요나라"라는 말로 나에게 인사해줬다.
청소를 다 하고 나니 내 짐은 얼추 캐리어 하나를 채우고 배낭을 꽤나 많이 채우는 정도의 양이 나왔다. 공유 하우스에 살지 않았더라면 그 외의 짐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비용이나 여차저차 생각해보면 오히려 혼자 사는 게 더 저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서명하고, 키를 반납하고 집을 나섰다.
시간을 좀 더 되돌리면 퇴사 통보를 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어떤 짓을 하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 놀리면 안 되는데라고 입으론 말하지만 가장 앞장서서 누군가를 놀리곤 한다. 일본인 사장 "K"는 머리숱이 없다. 그래서 나는 문어라고 불렀다. 그의 남은 머리털은 가쓰오부시라고 불렀다.
최초에 일본에 들어올 땐 난 딱 1년 보고 괜찮으면 계속하고 아니면 그만둔다라고 생각했다. 나의 퇴사를 강력히 결정지은 사건은 약 5달 만에 일어나긴 했지만. 날이 오기까지 칼만 열심히 갈고 있던 나는 11월에 퇴사를 통보했다. 사실 그다음 거처가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다음 회사에서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어느 학교에 원서를 내서 입학 통보를 받은 상태는 아니었다. 이 둘 중 하나만 되었더라도 지구를 도는 달처럼 나는 계속 제도권의 삶을 꾸준히 유지해 나갔을 것이다.
아무튼 나의 퇴사 통보를 받은 "K"는 시마따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담담히 받아들였다. 당시 나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대표랑 말은 안 통하지만, 그래도 대표가 기술력은 있는 친구라고 생각하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본인이 생각하기에 에이스 엔지니어 이름을 말했다. 그 이름은 "이시하라"이며 일본에서 흔히 말하는 "토다이" 우리나라 말로는 "동경대"출신의 사내였다. 그는 좋은 건축가긴 했지만 좋은 엔지니어는 아니었다. 그것을 보며 이곳의 운도 머지않았구나 싶었다. 나는 보통 생각이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도 내 얼굴을 읽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학벌주의가 머리를 지배한 그로선 그다지 받아들이진 못했던 것 같다.
우리 회사는 신토미초라는 곳에 있었다. 관광객에게 좀 더 유리하게 말하자면 츠키지 시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대표 "K"는 나의 퇴사를 기념(?)하고 사원들의 우애를 다지기 위해 연말 회식을 겸해서 자리를 마련했다. 그때 먹은 물고기가 여럿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커다란 생선이었다. 아마도 참치였겠지. 하지만 기억에 남는 가장 큰 이유는 보노보노 마냥 조개껍데기로 생선을 긁어먹었기 때문이다. 사실 난 날것을 잘 못 먹는 편인데, 그래도 뭔가 내 월급만큼 썼을 거 같은 그런 음식이어서 최대한 꾸역꾸역 먹은 기억이 난다.
나중에 친구를 통해 들은 소식은 그때 회식을 같이했던 사람 중 내 친구 포함 4명이 퇴사했다. 그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뭔가 회식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런 떠들썩한 분위기보다는 퇴사자로서 진심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런 걸 대표랑 1:1로 얘기하고 싶었던 듯하다. 하긴 생각해보면 떠나는 마당에 말해봐야 무엇하냐 싶기도 하지만.
공항으로 가는 길은 외롭지 않았다. 캐리어를 가득 채운 짐과 배낭. 그리고 마지막 길을 배웅하러 내 친구가 와주었다. 나는 누누이 12월에 떠날 것을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친구를 해외에 놓고 혼자 간다는 마음은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있었다. 하네다 공항의 연말 분위기, 어두컴컴한 공항에서 여러 가지를 마무리하고 친구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난 검색대를 지나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 안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은 몽환적이었다. 어느 동네는 어두컴컴하고 어느 동네는 대낮처럼 밝았다. 바다에는 조업하는 배들의 불빛이 보였다. 몇몇 도시에선 폭죽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일본땅이 보이다가 잠시간 어두운 구간을 지났다. 지도를 보니 동해상 위였다. 그리고 잠시 후 부산 위를 지나게 되었다. 한국땅의 불빛의 크기가 일본의 그것에 비해 작다는 것이 약간은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젠 집으로 간다는 사실에 설레었다. 분명 인천으로 귀국했는데, 김포로 밤에 도착했던 때가 떠오르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딴소리를 하자면, 김포로 밤에 귀국했던 때 밤하늘이 가장 아름다웠다. 그 불빛은 다른 어느 곳에 비할게 못되었다. 어쨌든 인천공항으로 도착했다.
지구 온난화라는 게 몸으로 체감될 만큼 1월임에도 한국은 비가 내리고 있어 당황스러웠다. 내심 눈 내리는 서울을 기대했는데. 한국에서의 처음을 파라다이스 시티에 가서 완공된 건물을 보고 싶었으나 짐이나 여차저차 사정으로 못 보고 집으로 출발했다. 6011번 버스를 타고 연희 104 고지에 내렸다. 그리고 잠시간 걸어 2년간 그대로인 현관문 비밀번호와 집 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도착했다.
이 뒤의 이야기는 다른 시리즈로 이야기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여기엔 짧게 적어야겠다. 그 이후 약 3~4회 정도의 이직 기회가 있었다. 그때 당시 나는 유학을 가야 한다는 생각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몇몇 제안은 아주 심각한 고민을, 다른 제안은 별생각 없이 거절하게 되었다. 그때 그 선택이 잘된 건지 잘못된 건진 아직은 모르겠다.
아마 받아들였다면 안정적인 수입은 있었겠지만 현실과 꿈 사이의 괴리, 그리고 더 이상 분야를 확장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괴로워했을 것 같다. 반대로 현재의 대학원 생활을 얘기하자면 이런 식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미꾸라지 운송차량에 메기를 한 마리씩 넣는다고 한다. 그래야 약간의 스트레스를 통해 운송 지점까지 생존율 높게 도착한다고 한다. 현재 나의 대학원 생활은 그 어떤 가이드도 존재하지 않는다. 건축은 제약 상황을 통해 모든 에너지를 극대화하는 그런 성향을 가졌다. 한데 나의 생활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피드백도 없고 어떤 때는 길을 잃은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짧게 얘기하기로 했으니까. 여하튼 나는 이렇게 2020년 이후로 건축, 파사드 컨설턴트 자리를 떠났다. 마지막 이야기를 이렇게 썼으니 숭숭 구멍 뚫린 중간 이야기들을 이제 채워나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