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가 논문을 요약해 주는 시대, ‘지식’을 넘어 ‘맥락’ 기획하기
얼마 전, 군산 예비국제회의지구 역량강화 교육을 위해 과총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모인 학회 및 기관 담당자분들께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챗GPT가 수백 페이지의 논문을 단 3초 만에 요약해 주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연구자들은 왜 굳이 비싼 비행기 표를 끊고, 시간을 들여 현장에 모여야 할까요?"
더 이상 단순한 ‘지식 전달’은 컨퍼런스의 경쟁력이 되기 어렵습니다. 온라인으로 대체 가능한 콘텐츠가 늘어날수록,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화면 너머로는 느낄 수 없는 오감(Five Senses)이 살아있는 진짜 연결(Real Connection)을 갈구합니다.
결국 AI 시대의 오프라인 행사는 ‘Content(지식)’를 얻는 곳이 아니라, 그 지식이 탄생한 배경과 사람을 잇는 ‘Context(맥락)’를 경험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오늘은 그날 강의에서 나눴던 이야기 중, 2026년 행사를 준비하는 기획자분들이 꼭 기억했으면 하는 ‘맥락을 설계하는 3가지 기획 공식’을 공유하려 합니다.
행사장을 선정할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수용 인원과 접근성을 먼저 따집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질문은 "이 공간이 참가자의 태도를 어떻게 바꾸는가?"여야 합니다. 공간은 그 자체로 참가자의 학습 경험을 결정짓는 강력한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꽉 막힌 호텔 볼룸을 떠올려보세요. 그 엄숙함은 참가자를 팔짱 낀 채 듣기만 하는 ‘수동적인 청중’으로 만듭니다. 반면, 층고가 높고 탁 트인 갤러리나 낡은 공장을 개조한 공간은 어떤가요?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킵니다. 권위를 내려놓게 하고, 더 자유로운 토론과 창의적인 사고를 자극하죠.
[Insight] 오스트리아 린츠,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Ars Electronica)
세계적인 미디어아트 융합 축제인 아르스 일렉트로니카는 매끈한 컨벤션 센터 대신 폐쇄된 ‘우편물 물류 센터(Post City)’를 행사장으로 씁니다. 거대한 물류 기계들이 멈춰 선 공간에서 AI와 예술의 미래를 논하는 경험. 참가자들은 그 공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술과 인간은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가?"라는 화두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공간 자체가 텍스트보다 강력한 메시지가 되는 순간입니다.
도시 선정은 단순히 교통 편의성만 보고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행사의 주제와 화학적 결합이 가능한 산업 자원이 그 도시에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만약 ‘스마트 제조’나 ‘재생 에너지’ 관련 학술대회라면 어떨까요? 호텔 회의실에 앉아 PPT만 보는 것보다, 실제 기계가 돌아가는 군산이나 울산의 산업체 현장이 수십 배 더 강력한 ‘살아있는 교재’가 됩니다. 세션과 연계된 테크니컬 투어를 통해 참가자들은 "우리가 다루는 문제가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직관적으로 목격할 수 있으니까요.
이는 비용의 효율성(Cost Efficiency) 측면에서도 탁월합니다. 지역의 유니크 베뉴나 산업 현장을 활용하면 대관료를 절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자체의 행정 및 예산 지원을 받을 확실한 명분이 생깁니다. 도시는 자신의 산업 인프라를 홍보해서 좋고, 주최자는 차별화된 콘텐츠를 얻어서 좋은, 그야말로 완벽한 ‘Win-Win’ 전략입니다.
공간이 하드웨어라면, 이를 채우는 것은 소프트웨어, 즉 ‘커뮤니티’입니다. 오프라인에서의 밀도 높은 만남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디지털 툴을 통해 행사 전후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최근 성공한 컨퍼런스들을 보면 Discord, Slack 같은 툴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관심사별 채널에서 소통하며 라포(Rapport)를 형성하죠. 이렇게 온라인에서 미리 데워진 온도는 오프라인 현장에서 만났을 때 폭발적인 네트워킹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디지털은 세렌디피티(Serendipity, 뜻밖의 행운)를 설계합니다.
"이 주제에 관심 있는 분들은 점심시간에 B구역으로 모이세요."
"오늘 밤 아시아 학계의 이야기들을 논의하고 싶은 사람들은 함께 Korean BBQ Night을 가집시다."
디지털 툴이 제안하는 정교한 큐레이션은 낯선 사람들 사이의 장벽을 낮춰줍니다.
이렇게 형성된 관계는 학회가 끝난 후에도 지속되는 ‘연구 파트너십’이나 ‘비즈니스 기회’로 발전합니다.
내년 행사를 기획하고 계신다면, 잠시 멈추고 다음 체크리스트를 통해 우리 행사의 ‘목적 적합성’을 점검해보실 수 있는 체크리스트를 공유해 봅니다.
1. [Space] 공간의 기능성
□ 이 공간은 참가자들의 창의적인 사고를 자극하고, 권위를 내려놓게 만드는 분위기인가요?
□ 공간의 구조가 참가자 간의 우연한 마주침과 네트워킹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나요?
2. [Context] 지역과의 맥락
□ 개최 도시의 산업 자원이나 역사가 행사의 학술적 주제와 연결되어 시너지를 내나요?
□ 강의실을 벗어나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끼며 학습할 수 있는 필드 트립 요소가 있나요?
3. [Immersion] 몰입과 밀도
□ 일방적인 지식 전달(Lecture)보다, 참가자들이 상호 작용하며 밀도 있게 정보를 교류하는(Interaction) 시간이 충분한가요?
□ 공간과 프로그램이 참가자를 수동적 관객이 아닌 능동적 참여자로 만드는가요?
4. [Digital] 연결의 도구
□ 행사 전부터 참가자들이 학술적 관심사를 공유하고 사전 토론할 수 있는 디지털 채널이 있나요?
□ 현장에서 관심사가 비슷한 연구자/참가자를 연결해주는 장치(앱, 현장 매칭 등)가 작동하나요?
5. [Legacy] 지속가능성
□ 행사가 끝난 후, 참가자들은 단순한 기념품이 아닌 '지속 가능한 네트워크'와 '통찰'을 가져가나요?
AI가 똑똑해질수록, 인간은 더 간절하게 ‘맥락(Context)’과 ‘만남’을 원합니다. 역사적 서사가 깃든 지역의 창고에서, 역동적인 산업 현장 한가운데서 나누는 대화는 챗GPT가 아무리 뛰어나도 요약해줄 수 없는 ‘살아있는 지식’이 됩니다.
내년, 여러분의 행사는 어디로 떠나시나요?
단순히 장소를 대관하는 것을 넘어, 도시의 서사를 빌려와 학습과 교류의 밀도를 높이는 기획.
그 여정은 학술대회의 목적부터 학회의 문화를 파악하고 이에 맞는 도시부터 베뉴를 설정하는 것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이 글은 매주 목요일 발행되는 닷플래너의 '기획자의 목요일'의 <기획자의 시선>을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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