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 꼬리가 되느냐 닭 대가리가 되느냐?"
어릴 때부터 참 많이 들어온 비유다.
골자는 공부 잘하는, 잘 나가는 학교에서 꼴찌를 할 것이냐, 아님, 속된 말로 '똥통'(참 오랜만에 써 보는 비속어다) 학교에서 일등을 할 것이냐.
딱 25년 전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시절에도 이런 고민을 했더랬다.
당시,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서울의 모 외국어 고등학교에 다녔더랬다.
중학교 때 미처 제대로 준비하지도 못한 채, 단 두어 달을 힘들게 보습학원에서 밤을 새 가며 벼락치기로 준비한 나였지만, 참으로 운 좋게 붙었던 그곳.
그렇다고 가고자 했던 마음이 간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남들 다 부러워하던 외고생이 되었다.
하지만, 지기 싫어하고, 자존심은 센데, 자존감이 딱히 높지 않은 나에게 외고는 잘 맞지 않는 명품 재킷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금수저'란 단어조차 없던 그 시절, 그 숱한 '금수저'들을 나는 그곳에서 무수히도 많이 만났다.
외고에 다녔던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이 세상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누구누구의 딸, 아들들이 외모, 집안, 공부 뭐 한 군데도 빠지지 않는다는 '넘사벽' 현실만을 깨우쳤다.
결국, 자존감이 자존심을 이기지 못했던 17살의 나는 내로라할만한 자랑거리였던 외고생 이름표를 떼 버리고 일반 여자고등학교로 돌연 전학을 떠났다.
용 꼬리를 견디지 못해 닭 대가리가 되기를 자처했던 것이랄까.
그때의 패배주의적이고도 무모했던 과감함이 결국엔 내가 원했던 대학교에 진학하는 데에는 보탬이 되어 주었지만.
그 뒤로도 내 긴 인생에서 몇 번은 그토록 어렵게 성취했던 것들을 돌연 벗어던지고, 바닥부터 시작하는 선택들을 종종 해왔다.
그래서 지금 남들과 다른 인생을 외국에서 살고 있는 것 인도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바로 그 '용 꼬리'와 '닭 대가리' 사이에서 또다시 갈등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내려졌던 근신 처분을 4개월 만에 이겨 내고 안정기에 접어든 것 같았지만 (참고: 코로나 백수가 된다는 것), 이 거대한 조직에서 용 꼬리로 추락했다는 패배감과 상처는 쉽사리 아물지 않았다.
HR에서는 "우리 조직에서는 PIP(Performance Improvement Program)을 받은 사람들 중에 성공적으로 졸업하고 조직에서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여러 번 강조했지만. 실제 팀 내에도 누구 한명이 있는걸로 알고 있지만...
그런 말로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지난 7년간 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상도 받고 연수도 갔다오고 승진도 했던 나인데, 그런 자부심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말 잘 듣는 부품이 되는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니, 뭔가 내 자신과 색깔을 잃어버린 느낌이랄까.
길을 잃었다.
지난 14년 남짓한 내 커리어 기간 동안 난 참 열심히도 살았었기에.
이번의 사태가 마무리된 뒤에도, "너네가 어떻게" "내가 왜 이런 처분을?" "일만 열심히 한 나에게 니들이 왜 이래?" 하는 억울한 감정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래서 시작한 게 '이직 놀이'인데...
한국에서 5년간 일을 하고 유학길에 오른 뒤 다시 싱가포르에서 재취업을 한 2012년 이래로 난 조직에서 위기를 겪을 때마다 이력서를 날려댔다.
'아직 이 취업 시장에서 건재하다'는 걸 확인하고자 하는 나만의 보상심리였는지도 모른다.한국이나 일본처럼 아직 평생직장 개념이 강한 곳에서는 커리어를 망치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싱가포르라는 나라는 노조 설립 자체가 허용이 안 되는 신자유주의의 총아와도 같은 나라이기에 해고와 이직이 흔하디 흔한 일이다. '싱가포르에서 사는 직장인들은 항상 업데이트된 이력서를 지니고 다닌다. (요즘은 링크드인 업데이트)'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말레이시안 차이니즈인 남자친구조차 '직장은 또 구하면 되는건데 뭘 그리 끙끙 앓느냐'며 회사와 자아정체성을 동일시하는 날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여하튼, 그렇게 시작된 이직 랠리 끝에 150군데에 이력서를 보내고, 10군데가 넘는 곳과 인터뷰를 하고 겨우 하나의 오퍼를 받아냈다.
코로나19 탓에 싱가포르 잡 마켓도 양질의 일자리 가뭄이 시작되면서 평소보다 더 오래 걸린 탓도 있었겠지만, 이번엔 전보다 꽤 오래 그리고 많이 이직을 알아본 것 같다. 오퍼를 받는 데까지 딱 8개월이 걸렸다.
근데 문제는 내가 새로 잡 오퍼를 받은 곳이 설립한 지 6년밖에 안 되는 스타트업 기업이라는 거다. 가는 분야와 범위가 넓어지고, 연봉을 현재와 비슷하게 맞춰 주는 것에 감사하며 과감하게 사표를 날리고 떠나기에는 뭔가 2% 부족한 느낌이다. 매출이 수직상승 하며 잘 나간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외부 펀딩이 주요 수입원이기에 리스크 테이킹을 해야 하는 건 사실이다.
대신,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는 내가 마지막 보루로 생각했던 경쟁사까지 사들이며, 덩치를 키우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시장 지배적인 기업이다. 그리고 파키스탄계 매니저와 궁합이 안 맞아 사단이 벌어질 것일 뿐, 회사 전체적으로 큰 불만은 없다. 한 마디로 지금 회사는 나에게 일말의 자신감, 어쩌면 허영심을 수혈해주는 명품 가방 같은 느낌이랄 까. 하지만 이 팀에서 나가야 한다는 건 명백한 결론이다. 팀을 옮기거나 이직을 하거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고급 노예가 되어 용꼬리로 남을 것인가.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닭대가리로 살아갈 것인가.
혹자가 보면, 이 어려운 코로나 시국에 오퍼도 받고 배부른 소리 한다고 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남들 놀 때, 남들 쉴 때, 남들 티브이 볼 때, 남들 놀러 다닐 때, 남들 잠잘 때,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노력해 가며 살아온 내 인생이기에, 어렵게 성취한 용꼬리를 선뜻 잘라 버리기에는 2% 부족한 닭대가리 자리가 딱히 성에 차지 않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렇게 아등바등 악바리처럼 살아온 인생이기에, 어느 어느 회사를 다닌다는 자부심은 그나마 열심히 살아왔다는 걸 증명해 주는 '인생 성적표'와도 같은 것이라 쉽게 포기가 안된다. 그래서 미련하게도 직장 타이틀과 내 자신의 자부심, 혹은 자의식, 혹은 자 아정체성을 동일시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불혹의 나이. 나는 아직 남편도 없고 애도 없고 돈도 없다. 그래서 더더욱 직장 네임밸류에 목을 매는 건지도 모르겠다.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이런 혼돈 속에서 지난 3일간 밤잠을 설쳤다.
그래서 이렇게 브런치에 고해성사하듯, 지식인에 질문하듯, 취업 상담하듯 끄적거리며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겸허한 마음으로 때를 기다리며 용 꼬리 자리에서 인내할 것인가.
지난날, 공든 탑을 무모한 자신감으로 무너트리며 바닥부터 시작했던 닭대가리의 삶을 다시 선택할 것인가. 선뜻 그 선택이 쉽지 않은 건 나이 탓일까.
자존감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일말의 자부심을 버릴 것인가
일말의 자부심을 수혈받기 위해 자존심과 자존감을 양보할 것인가
오퍼 수락 기한이 3일 앞으로 다가왔다.
모레는 또 다른 작은 회사와 인터뷰가 잡혀 있다.
오늘도 잠 못 드는 고민의 밤이 이어질 것인가.
나중에도 후회하지 않을 지혜로운 해답을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