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한 외국인 노동자

by 몽생

1948년 10월 30일. 대한국민항공사(KNA·대한항공 전신) 소속 민간 단발 경비행기 한 대가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떴다. 이 소형기 날갯짓 이후 68년이 지나고 한국은 연간 항공 여객 1억명 시대를 맞이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16년 국내 항공 여객은 1억379만명으로 최초로 1억명을 돌파할 것으로 분석됐다. 2010년 이후 본격적으로 사세를 확장한 저비용항공사(LCC)가 저가 수요를 끌어올렸고…


이 신문기사 내용처럼, 저가항공의 등장과 해외 여행의 보편화는 이 땅의 수많은 ‘흙수저’들에게도 외국을 경험할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특히, 정부와 민간이 후원하는 다양한 해외체험프로그램의 등장은 해외 여행을 사치재에서 보편재로 바꾸는 기폭제가 됐다. 나도 그 수혜자 중 하나다.


2001년 내가 대학교 3학년이던 시절, 내가 다니던 대학교 캠퍼스에선 1년짜리 해외 어학연수와 1달짜리 유럽 배낭 여행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한국의 왠만한 중산층 가정에선 이 정도의 지원은 아이들에게 해주는 것이 거의 불문율처럼 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이 또한 나같은 흙수저 내지 동수저들에겐 그림의 떡. 대신 나는 외국을 경험할 수 있는 다른 저렴한 방도들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흙수저들에겐 값비싼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오랜 정보수집 끝에 직접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호주 대신 일자리 알선 후 현지에 파견되는 미국을 택했다.


비행기표와 수속비, 에이전트 피가 모두 포함된 300만원을 내고 난 미국, LA행 비행기에 올랐다.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지구를 바라본 기분은 아찔했다.


착륙 직전 비행기 창문으로 내려다 보이는 미국 LA 주택가의 모습은 마치 동화같았다. 알록달록한 지붕과 따뜻한 색감의 벽면, 아름드리 나무들로 꾸며진 도시는 비현실적이었다. 나는 순간, 꿈을 꾸는 듯한 기분에 취했었다.


나는 미국 네바다주(Nevada)에 있는 요새미티 국립공원 내 고급 숙박시설인 어와니(Ahwahnee) 호텔에 인턴으로 취직이 되어 가게 됐다. 영어가 짧은 이유로, 그때 함께 갔던 한국인 10여명은 모두 호텔 방을 치우는 하우스키핑(Housekeeping) 보직으로 배정이 됐다.


난생 처음 해보는 노동이었지만, 꽤 재미있었다. 우리의 주요 업무는 ‘making bed’. 새하얀 침대 시트 한장으로 매트리스를 감싸고, 나머지 두 장 사이에 담요를 넣은 뒤 이불을 만드는 작업이다. 하루에 우리가 맡은 객실은 최소 10개. 각 방마다 엄청나게 무거운 킹 베드 매트리스를 두 채씩 도맡아 침대보를 끼우고, 바닥을 청소기로 밀고, 어지러진 방을 정리하는 작업은 매우 고됐다.


하루는 격무에 지쳐 한밤중에 쌍코피가 터지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노동자 생활은 괴롭다기 보단 신선했고 설레고 즐거웠다. 난 어릴 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마치 숙제처럼 들고 다녔었다. 동수저 집안 출신이었지만 꽤 잘했던 공부 탓에 나는 대체로 곱게 자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매일 10개씩 호텔 방만 하루종일 치우다 보니 막상 우리의 주요 목적인 해외 문화 체험과 어학 연수의 기회가 부족했다. 같이 갔던 몇명의 친구들을 중심으로, 다른 지역에 가서 직접 다른 일자리를 구해보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요새미티 국립공원에는 먼저 도착한 한국인들을 비롯해 총 30여명의 한국 대학생들이 일하고 있었는데, 영어가 짧다는 이유로 한국인들만 집중적으로 영어 사용이 거의 필요 없는 방청소 보직을 받은 것이 가장 큰 불만이었다. 비교적 영어가 되는 멕시코, 브라질, 페루 등 남미에서 온 대학생들은 상점 캐셔(Casher)나 스키리조트 강사, 리프트 안전요원 등으로 취업이 돼 우리보다 좋은 ‘꿀보직’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


당시 내가 이용한 비자는 J-1 비자라고, 미국에 문화 교류나 학술 등 단기 방문을 목적으로 최장 6개월을 거주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단기 취업도 허용하는 종류였다. 이에 의기투합한 10여명의 한국인들은 요새미티 국립공원에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멘땅에 헤딩하는 모험을 시작한다.


우리는 하루 30불에 렌트카를 빌려서 근처 카지노의 도시인 리노(Reno)를 시작으로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라스베이거스와 주변 소도시를 죄다 돌았지만 인터뷰 한번 보자는 곳이 없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카지노 호텔들이 몰려있는 또다른 소도시인 사우스 레이크타호(South Lake Tahoe) 라는 곳에 다다랐다.


나는 하라스(Harrah’s) 라는 카지노 호텔에 무작정 이력서를 들고 찾아갔다. 다행히 나를 포함, 몇몇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한국 친구들이 인터뷰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호텔 직원들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동양인 20대들을 신기해 했다. 30분여의 인터뷰 끝에 나와 다른 한명의 친구는 하우스키핑으로 취업이 되었다. 21살 평생 처음 하는 취업이었다.


J-1 비자가 만료되기 직전에 간신히 일자리를 구함에 따라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아쉽게도 보직은 그전과 같이 호텔방을 청소하고 침대보를 씌우는 막노동이었지만, 요새미티 국립공원에 갇혀서 세상 구경을 못하고 지내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었다.


문제는 나머지 5명의 친구들이었다. 이 친구들은 일주일 내에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미국에서 불법체류자 신세로 추방 당할 위기에 처했다.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해 주변 호텔은 물론 레스토랑까지 샅샅이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인터뷰 요청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어느 날, 하라스 호텔 바로 옆 포시즌스(Four Seasons) 호텔에서 Busser(식당에서 음료 등을 서빙하고 치우는 직업)를 구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알고보니 그 식당에서 일하는 한국계 미국인 주방장의 도움이 컸다. 가까스로 멘땅에 헤딩하듯 요새미티를 탈출한 한국인 10여명은 모두 합법적으로 미국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달여가 지난 뒤, 나는 포시즌스호텔 레스토랑 Busser 자리가 공석이라는 정보를 얻고 그쪽으로 ‘이직’까지 하게 됐다. 당시 미미(Mimi)라는 이름으로 근무했던 나는 아시안 불모지나 다름 없던 미국의 시골 마을, 사우스 레이크 타호에서 새출발을 시작했다.


주중에는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고 주말에는 남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스키장 리프트 1회권을 시즌권처럼 재사용하며 공짜 스키를 즐겼다. 휴가때는 렌트카를 빌려 미국 서부 곳곳을 여행했다. LA, 샌프란시스코, 라스베이거스, 리노 등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돌아다녔다.


비록 3D 밑바닥 직업이었지만, 시급 2500원과 팁으로 매일 평균 받은 200불 가량의 돈은 한달에 최소 250만원 가량의, 당시로선 꽤 큰 돈을 손에 쥐게 해주었다.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가보고 싶은 곳 등 스물한 살이 즐길 수 있는 모든 것과 자유를 만끽하며 행복한 외국인 노동자로 6개월을 보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내 평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난 주저없이 이때를 떠올릴 것이다.


딱히 대단한 것도 아닌 한국에서의 사회적 지위, 개천에서 용 난 SKY 명문대생, 그리고 앞으로도 개천에서 용 나야 할 번듯한 커리어를 꿈꾸며 정해진 길위에서 사투를 벌일 나.


사회적으로 정의 내려진 자의식을 벗어던지고, 미국이라는 자유의 땅에서 나는 밑바닥부터 시작했다. 내 힘으로 일을 구하고, 내 힘으로 집을 구하고, 내힘으로 정착을 하고 적응해 나가며 그 속에서 삶의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나는 비로소 난생 처음으로 ‘자유’라는 걸 느꼈다. 나는 공부를 잘 하니까. 비록 개천에서 난 용일 지라도 성공하고 출세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어차피 이방인’이라는 내려놓음으로 시작해 점차 일구어 나가는 삶. 나쁘지 않았다. 신선하고 가슴 뛰었다.


급기야 나는 6개월간의 J-1 비자 프로그램이 종료되는 시점에 체류 연장을 목적으로 캐나다로 건너가 모아놓은 돈으로 어학연수를 하고 대학교에 편입해 본격적으로 이민 생활을 시작해야 겠다는 결심까지 하기 이른다.


그러던 어느날, “Mimi, your mom has called. (미미, 너희 엄마한테 전화왔어.)” 당시 집을 쉐어하던 페루 친구가 대뜸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며 나를 찾았다.

엄마는 내가 무려 두 달이나 집에 전화를 안 하자, 워킹홀리데이를 주선한 여행사와 우리들을 감시하는 미국 이민국 직원까지 수소문해 내가 묵던 집 전화번호를 알아내 날 찾아냈다.


21년만에 세상 구경을 하고 자유인이 되었던 미미는 이렇게 덜미를 잡히고 만다. 엄마는 딸의 엉뚱한 이민 계획을 만류하려 한학기 등록금까지 미리 납부하고, 수강신청까지 본인 취향대로 해 놓으시고는 “학비 날리고 F맞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라며 최후통첩을 날렸다. 결국, 나는 “어렵게 들어간 학교는 졸업해야 한다”는 엄마의 만류를 이기지 못하고, J-1비자가 만료될 무렵이던 2001년 4월, 강제로 귀국하게 됐다.


지금도 문득 이런 상상을 한다. 만약 그때 돌아오지 않고 캐나다로 넘어가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갔다면 나는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21살이던 내가 느꼈던 자유와 행복,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모험정신과 도전정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용기있게 선택했던 무모한 대범함. 차라리 이방인이었기에 벗어 던질 수 있었던 정형화되고 서열화된 한국식 삶의 굴레. 본전생각 나게 만드는 어중간한 사회적 위치. 그런 한국 사회에 대한 염증. 그걸 박차고, 가지 않은 사막 위에 내 발자국 하나 남겼을 때 느꼈던 짜릿한 희열. 나는 이런 것들이 내 인생을 지금까지도 전세계를 떠도는 '코리아 노마드'로 이끈 단초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아마 나와 비슷한 다른 코리아 노마드들도 그러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keyword
이전 01화코리아 노마드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