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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Oct 27. 2023

꿀땅콩이 왔어요

고2 가을 뜬금없이 가발이 쓰고 싶었다. 어느 날 친구들과 백화점을 돌다가 발견한 가발 매장에 눈이 꽂혀버린 것이다. 보브 커트라고 불렸던 그 헤어스타일을 본 순간 내 관심은 저 가발을 어서 내 머리에 올려놓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인조가발이었지만 반질반질 티 나는 지하상가 3만 원대의 가발이 아니었다. 나름 스칼렛 오하라의 이름을 딴 스칼렛가발이었다. 다행히 꿍쳐놓은 돈도 있었다. 문제는 내 돈인데도 내 맘대로 사기는 영 껄끄러운 마음이었다.


"엄마, 나 가발 사도 돼?"

"너! 사기만 해봐!!"


어린애도 아닌데 가발 하나 사는 게 뭐 그리 큰 일이라고 엄마는 저렇게 화를 내실까. 가발 사면 정말 엄마한테 맞는 거 아니야?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가발을 머리에 올리고 싶은 욕구는 엄마라는 두려움도 가뿐히 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어느새 난 백화점 가발 매장 앞에 서있었고 꿈에도 그리던 보브커트 가발을 덜컥 사고 말았다. 매장에서 직원분의 도움으로 가발을 착용하자 머리에 풍성한 털모자를 쓴 느낌이었다. 그 당시엔 눈에 뭐가 씌었는지 투투의 황혜영으로 보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머리만 큰 외계인쯤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가발을 쓰고 가장 먼저 간 곳은 도서관이었다. 자리를 잡고 공부를 하는데 신경은 온통 거대한 머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 다행히 아무도 내 머리가 가발이라는 건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가발 초창기에 가발 쓴 고등학생을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였을 것이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혼날 각오를 하고 엄마에게 고백했다. 그런데 엄마의 반응은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넌지시 얘기해 뒀던 게 충격을 그만큼 덜어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고 와봐."

"응."


그리고 이어진 우리 집 가발 착용시간. 생전 처음 보는 가발을 엄마를 시작으로 온 가족이 한 번씩 돌려 써보고는 배꼽을 잡았다. 가발을 쓴 모습은 거울을 보자마자 웃음을 안겨줬다. 새 옷을 입고 거울을 보는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약간의 성형수술을 하고 거울을 보는 느낌이랄까. 암튼 절로 웃음이 나는 마력을 지녔음에 분명했다.


학교에 쓰고 다닐 수는 없었지만 주말이면 가발을 썼다. 갈 데가 없어도 가발을 쓰고는 좋아했다. 몇 번 가발을 쓰고 나면 정성스레 샴푸를 하고는 햇빛에 말렸다.


고이고이 간직하던 가발을 본격적으로 쓰게 된 겨울방학이 찾아왔다. 방학이면 스파르타식 학원에 한 달 동안 들어가 공부를 했다. 그 겨울방학, 나의 큰 결심은 가발을 쓰고 입소하는 것이었다. 이게 왜 큰 결심이냐면 아무도 내가 가발을 쓴 걸 알아서는 안되기 때문. 뭐.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겠지만 암튼 들키면 무지 쪽팔리니까.


아침 7시면 울려 퍼지는 기상나팔. 그 소리가 들리면 모두 꾸물거리며 일어나지만 난 총알처럼 일어나 사물함에서 망을 꺼내 뒤집어썼고 그 위로 가발을 올렸다. 그러고 나면 그제야 힘이 풀리면서 방금 잠에서 깬 척을 했다. 옆에 자는 친구도 내가 가발을 썼다는 건 모르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선 당연히 머리를 감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 몰래 감았다. 그러고 보니 머리를 어떻게 말렸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렇게 머리가 가려웠나. 매일 볼펜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던 생각이 난다.


무사히 30일을 넘기고 종강이 며칠 안 남았을 때였다.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분위기도 설렁설렁. 누군가의 엄마가 견과류 캔을 우리 반에 돌렸다. 심심하던 차에 견과류를 입에 넣으니 꿀맛이 따로 없다. 그래서 꿀땅콩인가 하며 땅콩을 위로 휙 던져 받아먹으려는 찰나. 앗. 가발이 훌러덩 벗겨졌다. 누가 봤니? 내 머리 망사?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재빨리 가발을 머리에 대충 올리고 교실을 기어 나갔다. 아 씨 이런.... 이틀만 있으면 끝나는데 하필 마지막에 이런 일이... 민망해하며 교실에 돌아왔다. 많지는 않았지만 순간 그 모습을 봤던 아이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아 쪽팔려. 그날 꿀땅콩은 왜 우리 반에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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