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10일. 비 오는 텐트
그림이 있는 책이 좋다. 삽화의 크기와 상관없이 있으면 좋다. 만화책이 좋다. 소년만화도 좋고 SF 만화도 좋다. 하지만 제법 편식도 하는 편이다. 현실감 있는 작품들은 싫어한다. 밥 속의 콩 같은 느낌이다. 현실감이 없어야 만화 같은 느낌이다. 다만 짜장면 위 완두콩이 소중하듯 가끔 재미가 없어야 하는 소재 중 재밌는 작품들이 있다.
피아노의 숲.
숲에서 태어난 아이가 쇼팽 콩쿠르에 출전하는 착한 클리셰가 가득한 기분 좋은 만화다. 나는 그 만화에서 쇼팽을 처음 만났다. 소리가 없는 만화에서 표현하는 음색은 엄청났다. 만화를 보다 그 음색이 궁금해 음악을 찾고 들었다. 내가 색을 글씨로 그리고 싶은 것은 아마 이 만화 덕분일 것이다.
만화에서 소개된 곡들은 쇼팽의 프렐류드다. 캐릭터들은 각자의 인생을 곡에 녹이며 연주하고 연기하는 모습을 비추는 방식으로 만화는 그려진다. 만화적 재미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흥미가 커진 부분은 여러 캐릭터의 개성과 인생을 다 품을 수 있는 쇼팽의 프렐류드란 소재다. 적히고 그려진 음색에서 아름답고 슬프게 그려진 음악들이 만화 곳곳을 채우고 있다. 묘사로 채워진 그 음색이 만화를 지배하고 있다.
프렐류드(Prelude). 어떤 곡의 도입부를 담당하는 짧은 악곡이다. pre라는 이전을 뜻하는 단어와 연주를 의미하는 lude가 합쳐져 탄생한 단어다. 한글로는 전주곡인데 우리가 자주 생략하는 간주곡과 같은 개념이다. 직역하자면 쇼팽의 프렐류드는 전주곡 모음집이다. 다만 각 곡들이 저마다의 색, 주제를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다. 길이도 한 곡당 3분 정도라 짧은 스토리를 빠르게 읽는 기분이다. 때로는 감정적으로 때로는 우아하게. 음악을 모르는 내가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쇼팽은 쉽고 멋있게 곡을 써놨다.
이번 3부의 제목을 프렐류드로 정한 것은 아마도 전주곡이란 의미와 동시에 쇼팽의 프렐류드에 대한 동경심이 큰 탓이다. 여러 일들을 통해 7월 이후 여행과 내 정신은 조각나 있다. 각각의 여행들마다 색채는 강했고 그에 따른 내 마음 또한 날카로웠다. 조각 져 버린 여행들에 대해 초입만 적었을 뿐 어떻게 엮을까 고민 중. 일요일 한낮에 틀어놓은 쇼팽의 프렐류드에 도움을 얻었다.
강릉, 동해, 울진, 청송, 화성 여행의 조각들을 담았다. 인생의 몇 안 되는 강렬한 순간이 점철된 여름에서 온전한 여행으로 완성시키고 또 그 과정을 글로 담기엔 내 그릇이 작았다. 대신 4화로 펼쳐지는 완결되지 않은, 마치 전주곡 같은 여행들을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담아 보았다. 온전하지 못한 것들을 기본으로 하나의 완성을 이루고자 하는 작은 바람으로 말이다.
전곡을 연주할 마음을 찾고 있다.
2022.10.10
가을비에 젖어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