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crocosm Jun 11. 2021

<런 온>을 런온하다

① Netflix <런 온> 1~3화를 보고 쓰다.


‘내가 모르는 새 우리나라 사람들 대화방식이 바뀐 건가. 코로나로 사람들을 너무 못 만나서 이렇게 변한 세상을 나만 몰랐던 걸까.’


이런 생각을 하게 한 드라마가 있으니 바로 <런 온>이다. 모니터 밖에서 이 드라마를 보고 있는 나만 냉동 수면을 백 년쯤 하고 깨어난 것 같았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말하거나,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바닥까지 긁어서 피가 나올 정도로 감정을 폭발시키는 게 보통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에서는 싱싱한 걸 넘어서는 야생의 말들이 오고 가는데 그들에게는 이런 말투가 매우 당연해 보였다. 처음 만나서 재수없다고 면전에 대고 공손하면서 솔직하게 말하는데도 상처 받기는커녕 그치 나 재수없지 하지를 않나, 기득권을 가진 사람에게 일적으로는 비굴할지언정 적어도 말로서는 감정노동을 하지 않았다.


오미주 : 제가 괘씸해서 통역 모가지 하신 거 십분 이해합니다, 교수님.


오미주(신세경 분)가 일을 가로채간 교수에게 하는 말이다. 일을 돌려받기 위해 사정을 하지만, 모가지라는 말로서 네가 한 일이 참 그 수준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이런 순간이 이 드라마를 가볍게 오락으로만 소비할 수 없게 했다.


여러 인물들 중에 가장 눈여겨보게  사람은 육상 단거리 국가대표 기선겸(임시완 )이었다. 기선겸을 보니  맞춰지는 퍼즐 조각들이 있었는데, 요즘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캐릭터가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깨달음이다. 정직과 성실 같은 원칙을 기반으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데, 감정으로 인해서  가치관을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행동한달까. 예를 들어 <동백꽃  무렵> 황용식(강하늘 ) 감정을 느끼는 대로 풍부하게 표현하는 설정, <비밀의 > 황시목(조승우 ) 뇌수술로 감정이 제거되어 느낄  없는 설정이고, < > 기선겸은 감정을 억누르는  습관이  설정인데, 이들 모두 가치관을 그대로 행동으로 내놓는 캐릭터라는 것이다. 감정이야 어떻든 본인이 하는 말과 행동이 가치관을 덮지도 훼손하지도 않는다.


저는 인간이 감정과 이성과 행동의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 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 중에 감정이 먼저 나타납니다. … 그 뒤에 그 감정의 이유를 찾기 위해 이성이 등장합니다. … 결론은 행동입니다. 어떤 행동을 선택하느냐는 같은 감정, 같은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다를 수 있습니다. … 이 일은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감정-이성-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스스로 흔쾌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일치된 삶입니다.
<솔직하게, 상처 주지 않게, 전미경 저> 프롤로그 중에서


그래서 그런가 이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걸 보면, 행동-이성-감정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한 팔로 안아도 다 안겨지지 않을 태고적부터 심겨 있던 통 굵은 나무 같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어떻게 그렇게 굵은 나무의 몸을 하고도 마치 하늘하늘한 꽃만 할 것 같은 사랑을 하고, 잘 손질된 정원수처럼 여러 사람과 협력해서 일을 좋은 방향으로 진행시킬까 하는 거다.


나는 내 감정을 감추고 다른 사람에 맞추어야 사랑을 하고, 일을 원만히 할 수가 있었다. 부모님의 감정 기복에 맞추어 모범생 모드로 살아왔고 집안의 종교에 맞추어 여러 가지 문화적 욕구도 눌러왔다. 직장에서는 고객을 보며 미소 지어야 했고, 가기 싫은 회식자리에서 웃고 노래하기도 했다. 버겁지만 그렇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하다가 감정을 더 이상 속이고 살 수 없다 생각하게 된 때가 있었으니 바로 친정과 시댁에서 내 역할에 대해 깨닫게 되었을 때였다.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중간에서 어느 누구도 서로에게 섭섭하지 않도록, 싸우지 않도록 가족들의 화를 받아 안아서 후련함을 생성하는 소화기관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같은 한국말로 서로 이야기하는데도 통역이 필요한 곳이 바로 가족 사이라니 아이러니였다.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고, 감정노동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중간에서 표면적으로 애써 돌려 말을 전하는 것만 멈추었을 뿐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들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 속 사람들은 그 말들을 다 하며 살고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나도 이렇게 말하면서 살 수 있을까.


감   독 : 야! 너 은퇴하고 코치 안 될 거야? 감독 안 될 거냐고. 징계 평생 꼬리표야.

기선겸 : 제 앞길에 그런 융통성을 바라신다면 저는 앞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되고 싶은 건 원칙을 지키는 지도자였거든요.


기선겸이 선수촌 내에서 본인과 연루된 폭력사건에 본인을 포함해서 마땅한 징계를 요청하자, 이를 막으려는 감독이 코치 자리를 놓고 협박성 발언을 했고, 그에 대해 기선 겸이 받아한 말이다. 이 장면을 보자마자 한 사람이 생각났다. 정직을 말하면서 거짓을 방법으로 삼았던 사람. 정직한 방법이 아니면 그 안에 정직을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다른 핑계로 그 모임에 더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기선겸을 보고 있자니 매운 입 안에 사이다를 붓는 것처럼 아팠다. 분명 시원한데 아팠다. 나도 저렇게 말하고 싶었던 거라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조금 더 쫓아가 보려고 한다. 정말 드라마라서 가능한 건지 아니면 저들의 말에 진정한 삶의 비기가 담겨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






* 사진출처 : 드라마 <런 온> 공식홈

(https://fs.jtbc.joins.com/prog/drama/runon/Img/site/ProgInfo/20201207133529.jpg)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