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Netflix <런 온> 1~3화를 보고 쓰다.
‘내가 모르는 새 우리나라 사람들 대화방식이 바뀐 건가. 코로나로 사람들을 너무 못 만나서 이렇게 변한 세상을 나만 몰랐던 걸까.’
이런 생각을 하게 한 드라마가 있으니 바로 <런 온>이다. 모니터 밖에서 이 드라마를 보고 있는 나만 냉동 수면을 백 년쯤 하고 깨어난 것 같았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말하거나,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바닥까지 긁어서 피가 나올 정도로 감정을 폭발시키는 게 보통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에서는 싱싱한 걸 넘어서는 야생의 말들이 오고 가는데 그들에게는 이런 말투가 매우 당연해 보였다. 처음 만나서 재수없다고 면전에 대고 공손하면서 솔직하게 말하는데도 상처 받기는커녕 그치 나 재수없지 하지를 않나, 기득권을 가진 사람에게 일적으로는 비굴할지언정 적어도 말로서는 감정노동을 하지 않았다.
오미주 : 제가 괘씸해서 통역 모가지 하신 거 십분 이해합니다, 교수님.
오미주(신세경 분)가 일을 가로채간 교수에게 하는 말이다. 일을 돌려받기 위해 사정을 하지만, 모가지라는 말로서 네가 한 일이 참 그 수준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이런 순간이 이 드라마를 가볍게 오락으로만 소비할 수 없게 했다.
여러 인물들 중에 가장 눈여겨보게 된 사람은 육상 단거리 국가대표 기선겸(임시완 분)이었다. 기선겸을 보니 짜 맞춰지는 퍼즐 조각들이 있었는데, 요즘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캐릭터가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깨달음이다. 정직과 성실 같은 원칙을 기반으로 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데, 감정으로 인해서 그 가치관을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행동한달까. 예를 들어 <동백꽃 필 무렵>의 황용식(강하늘 분)은 감정을 느끼는 대로 풍부하게 표현하는 설정, <비밀의 숲>의 황시목(조승우 분)은 뇌수술로 감정이 제거되어 느낄 수 없는 설정이고, <런 온>의 기선겸은 감정을 억누르는 게 습관이 된 설정인데, 이들 모두 가치관을 그대로 행동으로 내놓는 캐릭터라는 것이다. 감정이야 어떻든 본인이 하는 말과 행동이 가치관을 덮지도 훼손하지도 않는다.
저는 인간이 감정과 이성과 행동의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 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 중에 감정이 먼저 나타납니다. … 그 뒤에 그 감정의 이유를 찾기 위해 이성이 등장합니다. … 결론은 행동입니다. 어떤 행동을 선택하느냐는 같은 감정, 같은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다를 수 있습니다. … 이 일은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감정-이성-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스스로 흔쾌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일치된 삶입니다.
<솔직하게, 상처 주지 않게, 전미경 저> 프롤로그 중에서
그래서 그런가 이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걸 보면, 행동-이성-감정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한 팔로 안아도 다 안겨지지 않을 태고적부터 심겨 있던 통 굵은 나무 같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어떻게 그렇게 굵은 나무의 몸을 하고도 마치 하늘하늘한 꽃만 할 것 같은 사랑을 하고, 잘 손질된 정원수처럼 여러 사람과 협력해서 일을 좋은 방향으로 진행시킬까 하는 거다.
나는 내 감정을 감추고 다른 사람에 맞추어야 사랑을 하고, 일을 원만히 할 수가 있었다. 부모님의 감정 기복에 맞추어 모범생 모드로 살아왔고 집안의 종교에 맞추어 여러 가지 문화적 욕구도 눌러왔다. 직장에서는 고객을 보며 미소 지어야 했고, 가기 싫은 회식자리에서 웃고 노래하기도 했다. 버겁지만 그렇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하다가 감정을 더 이상 속이고 살 수 없다 생각하게 된 때가 있었으니 바로 친정과 시댁에서 내 역할에 대해 깨닫게 되었을 때였다.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중간에서 어느 누구도 서로에게 섭섭하지 않도록, 싸우지 않도록 가족들의 화를 받아 안아서 후련함을 생성하는 소화기관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같은 한국말로 서로 이야기하는데도 통역이 필요한 곳이 바로 가족 사이라니 아이러니였다.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고, 감정노동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중간에서 표면적으로 애써 돌려 말을 전하는 것만 멈추었을 뿐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들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 속 사람들은 그 말들을 다 하며 살고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나도 이렇게 말하면서 살 수 있을까.
감 독 : 야! 너 은퇴하고 코치 안 될 거야? 감독 안 될 거냐고. 징계 평생 꼬리표야.
기선겸 : 제 앞길에 그런 융통성을 바라신다면 저는 앞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되고 싶은 건 원칙을 지키는 지도자였거든요.
기선겸이 선수촌 내에서 본인과 연루된 폭력사건에 본인을 포함해서 마땅한 징계를 요청하자, 이를 막으려는 감독이 코치 자리를 놓고 협박성 발언을 했고, 그에 대해 기선 겸이 받아한 말이다. 이 장면을 보자마자 한 사람이 생각났다. 정직을 말하면서 거짓을 방법으로 삼았던 사람. 정직한 방법이 아니면 그 안에 정직을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한 나는 다른 핑계로 그 모임에 더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기선겸을 보고 있자니 매운 입 안에 사이다를 붓는 것처럼 아팠다. 분명 시원한데 아팠다. 나도 저렇게 말하고 싶었던 거라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조금 더 쫓아가 보려고 한다. 정말 드라마라서 가능한 건지 아니면 저들의 말에 진정한 삶의 비기가 담겨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
* 사진출처 : 드라마 <런 온> 공식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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