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crocosm Jul 06. 2021

자네는 좋은 대화가 무어라 생각하나

④ Netflix <런 온> 10~12화를 보고 쓰다.

나는 대화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족, 친구, 회사 동료들이 나를 찾아와 많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찾아와서 일부러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나와 대화하면서 재미있거나 숨통이 트이긴 하나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대화가 쉽지 않은 상대가 나타났으니 바로 아이였다. 아이가 문제집을 다 풀고 난 후 채점을 하는데, 틀렸다고 표시를 해놓으면 기분이 상해있다. 꼭 백점을 맞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틀리면 내가 이걸 모르는구나, 이걸 잘못해서 틀렸구나 아는 게 중요한 거야 하고 달래 보아도 엄마의 말은 잔소리일 뿐이다. 게다가 이렇게 말한다. 엄마는 문제를 풀지도 않고 해답을 보면서 틀렸다고 말하는 게 싫다고. 엄마는 어릴 때 다 배웠고 지금은 채점하는 사람이야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선생님 같은 엄마는 원치 않는다는 이야기인걸 알기에 그다음에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막막하다. 육아 프로그램이나 책에서는 상황에 아주 적절한, 지혜롭고 간단한 한마디를 누군가가 하면 아이가 그 말에 감동을 받아 대답은 물론 행동까지 바뀌기도 하던데,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하긴 한 걸까. 그런 자연스러운 현명한 한마디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영화 : 서단아 대표님요. 형한테도 갑질 한적 있어요?

기선겸 : ... 내가 갑질이라고 느껴본 적은 ... 딱히 없어요.

이영화 : 난 왜 갑질이라고 느꼈지?


이영화가 서단아 대표로부터 갑질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기선겸과  대화다. 이영화는 서단아가 갑질을 했다고 말하는데, 기선겸은 내가 갑질이라고 느낀 바가 있는지를 말한다.  말을 듣고 이영화도 나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된다. 내가  그렇게 느꼈지 라고. 이보다  완벽한 대화 교본이 있을까. 기선겸의 대화의 기술은 생각의 흐름을 '네가 그렇게 해서'에서 '내가 그렇게 느껴서' 옮겨가게 한다. 남을 탓하던 생각에서 나를 바라보게 한다. 만약에 기선겸이 "나한테는 갑질 한적 없어요." 라고 한다면 이영화는 " 나한테만 그러지?" 생각이 뻗어갔을 것이고, "나한테도 갑질 하죠." 하면 서단아는 갑질 하는 사람으로 단순화된다. 만약에 기선겸이 " 본인한테 갑질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지 말고, 본인이  그렇게 느꼈는지 생각해봐요."라고 한다면 어땠을까. 본인이  그렇게 느꼈는지를 생각해보기는 커녕 자기감정을 부정당한다고 느꼈을 것이고, 갑질 당했다고 느낀 자신을 책망하는 기선겸도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대화란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자라난다. 흐르는  같기도 햇빛 방향으로 자라는 식물 같기도  위를 기어가는 달팽이 같기도 하다.


박매이 : 자네는 좋은 번역이 무어라 생각하나.

오미주 : 최대한 기억에 안 남는 거? 안 거슬리고 스치듯 사라지는 거.


외국어 영화이지만 한국어 자막으로 보면서도 자연스러운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번역이 최대한 기억에 남지 않고, 거슬리지 않고 스치듯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대화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상대방의 생각을 억지로 바꾸는 충고나 잔소리가 아니라 내가 경험하고 느낀 솔직한 이야기나 환기가 되는 질문 같은 것. 그래서 그냥 가벼운 대화를 했을 뿐인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깨닫게 되거나 행동을 바꾸게 되는 것. 이것이 대화의 세련된 기술이 아닐까.





* 사진출처 : 드라마 <런 온> 공식홈

(https://fs.jtbc.joins.com/prog/drama/runon/Img/site/ProgInfo/20201207133529.jpg)

매거진의 이전글 삶을 통역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