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대 어느 여름날
� "아아아아아아..." 선풍기 앞에서 로봇 흉내를 내던 그 여름이 있었다.
위잉- 위잉-
낡은 선풍기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난다. 2025년 최신형 에어서큘레이터를 놔두고 굳이 창고에서 꺼낸 내 나이만큼 된 선풍기. 녹슨 나사, 누렇게 변한 플라스틱 날개, 그리고 희미하게 남아있는 '금성' 로고. 이 선풍기를 켜는 순간, 나는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 간다.
"아아아아아아- 나는 로봇이다아아아-"
1972년대 어느 여름날. 선풍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우리들. 바람에 떨리는 목소리가 재미있어서 깔깔대며 웃었다. 누가 더 웃긴 소리를 내나 경쟁하듯 온갖 소리를 질러댔다.
엄마는 그런 우리를 보며 한숨을 쉬셨다.
"또 선풍기 앞에서 장난치지 말라고 했지!"
하지만 엄마의 목소리에도 웃음이 섞여 있었다. 아마 엄마도 어린 시절 똑같은 장난을 치셨을 테니까.
그 시절 선풍기에도 계급이 있었다.
1단계는 부채. 할머니가 부쳐주시는 부채 바람은 세상 어떤 바람보다 시원했다. 낮잠 자는 손자를 위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부채질을 해주시던 할머니. 그 주름진 손등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2단계는 선풍기. 우리 집 선풍기는 타이머가 고장 나서 항상 켜두면 끝까지 돌았다. 새벽에 추워서 잠을 깨면, 엄마가 살그머니 와서 선풍기를 끄고 이불을 덮어주셨다.
3단계는 에어컨. 부잣집 친구네만 있던 에어컨. 그 집에 놀러 가는 날이면 일부러 오래 있다가 왔다. "우와, 너희 집은 겨울이야?" 하며 신기해하던 우리들.
선풍기를 틀어놓고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잤던 여름밤. 아빠는 선풍기를 독차지하려 했고, 엄마는 막내인 나를 선풍기 바람이 가장 잘 오는 자리에 눕혔다. 형은 투덜거리며 선풍기 방향을 계속 돌렸다.
"야, 나도 좀 쐬자!" "조금만, 조금만 더."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가도, 결국엔 다 함께 선풍기를 향해 누워 바람을 나눠 쐬었다.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매미 소리, 간간이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 그리고 선풍기의 위잉거리는 소리. 그 소리들이 만들어내는 여름밤의 교향곡 속에서 우리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선풍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바람의 방향을 조절하는 법. 선풍기 앞에 얼음 대야를 놓으면 더 시원하다는 것을 누가 가르쳐줬을까. 젖은 수건을 선풍기 뒤에 걸어두면 습도가 올라간다는 것도, 선풍기를 창문 쪽으로 틀면 환기가 된다는 것도, 모두 여름을 나며 터득한 삶의 지혜였다.
나눔의 미덕. 선풍기 하나로 온 가족이 시원함을 나눠야 했다. 회전 기능이 고장 났을 때는 10분씩 돌아가며 선풍기 앞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양보와 배려를 배웠다.
소중함의 가치. 선풍기가 고장 났을 때의 그 절망감이란. 아빠가 드라이버를 들고 선풍기를 분해하시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숨죽이고 지켜봤다.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선풍기를 보며 환호하던 그 순간의 기쁨.
2025년의 여름.
스마트폰으로 조작하는 AI 에어컨이 알아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한다. 공기청정 기능에 음이온까지 나온다는 최신형 에어서큘레이터가 거실을 지킨다.
하지만 왜일까. 그 완벽한 시원함 속에서도 가끔은 그 낡은 선풍기가 그립다.
"아빠, 이거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선풍기 소리에 짜증을 내는 아들을 보며 웃음이 난다.
"한번 해봐. 아아아아아-"
의외로 아들이 따라 한다. 그리고 깔깔대며 웃는다.
"우와, 진짜 로봇 같아요!"
그래, 이 재미는 시대가 변해도 똑같구나.
선풍기 바람에는 기억이 실려 있다.
할머니의 손맛이 밴 수박화채 냄새가 실려 있고, 엄마가 발라주던 베이비파우더 향기가 묻어 있고, 아빠의 구수한 땀냄새와 형과 함께 먹던 하드의 달콤함이 스며 있다.
무엇보다 그 바람 속에는 걱정 없이 행복했던 여름이 통째로 들어있다.
성적표를 받아도 방학이라 용서되던 여름. 매일이 모험이었던 여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여름.
이제 나도 할아버지가 되었다.
에어컨을 켜면 더 시원한 걸 알면서도, 가끔은 일부러 선풍기를 튼다. 아이들과 선풍기 앞에 앉아 "아아아아" 하며 논다.
"고모도 어렸을 때 이렇게 놀았어?"
"응, 고모도 할머니랑 이렇게 놀았지."
선풍기 바람에 실려 전해지는 것은 시원함만이 아니다. 세대를 넘어 전해지는 여름의 추억, 가족의 온기, 그리고 소박했지만 충만했던 행복의 기억이다.
창고에서 꺼낸 50년 된 선풍기는 여전히 돌아간다.
삐그덕거리지만 돌아간다. 느리지만 돌아간다. 시끄럽지만 돌아간다.
마치 우리의 추억처럼. 빛바랬지만 선명하고, 오래됐지만 생생하고, 단순했지만 강렬했던.
오늘도 선풍기는 돈다. 그리고 그 바람에 실려, 열살 여름의 내가 다시 찾아온다.
"아아아아아- 나는 로봇이다아아아-"
거실에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는구나. 선풍기 앞의 순수한 즐거움처럼. 여름날의 시원한 바람처럼. 그리고 가족과 함께하는 소중한 순간처럼.
위잉- 위잉-
선풍기는 오늘도 돈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추억과 일상을 이어주며. 여름과 여름을 맴돌며.
그래, 이게 여름이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서 누군가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할머니일까, 엄마일까. 아니면 열두살의 나일까.
선풍기 바람에 눈을 감는다. 그러면 다시 그 여름이 온다.
매미 울음소리와 함께, 수박 냄새와 함께,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여름방학과 함께.
"가장 좋은 에어컨은 추억이 담긴 선풍기다."
2025년 8월, 여전히 선풍기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