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공기가 주는 선물
예전에는 배낭을 메고 찾아왔던 지리산. 주말이면 등산화 끈을 동여매고 오르던 그 산이, 이제는 매일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일상이 되었다. 자영업을 하며 바쁜 도시 생활을 하던 내가 지리산 자락으로 터전을 옮긴 지도 이제 몇 달째.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매일매일이 새로운 발견의 연속이다.
등산객으로 지리산을 찾았을 때는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이 목표였다. 성취감을 위해, 운동을 위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찾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리산이 나를 품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지리산 봉우리들이다. 매일 같은 산인데도 매일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어떤 날은 맑고 선명하게, 어떤 날은 안개에 싸여 신비롭게, 또 어떤 날은 구름에 반쯤 가려져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도시에서 자영업을 하며 하루 종일 실내에 머물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삶은 정말 다르다. 창문을 열면 곧바로 들어오는 맑은 공기. 이 공기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달라진다.
특히 8월의 지리산 공기는 특별하다. 무더위 속에서도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한 바람이 산에서 내려온다. 도시의 끈적한 열기와는 전혀 다른, 깨끗하고 시원한 바람이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자영업 특성상 집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은데, 답답할 때마다 창문을 열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그러면 복잡했던 생각들이 정리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한다.
지리산의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이렇게 가까이서 느낄 줄은 몰랐다. 예전에 등산할 때는 주로 길만 보고 올랐는데, 이제는 산 전체의 윤곽과 표정을 매일 관찰할 수 있다.
계절이 바뀌면서 산의 색깔도 조금씩 변한다. 지금은 한여름이라 짙은 녹색이 주를 이루지만, 이곳에 와서 처음 맞은 봄에는 연둣빛이 물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가을이 되면 어떤 모습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특히 비 온 후의 지리산은 정말 아름답다. 안개가 봉우리들 사이를 감돌며 흐르는 모습은 마치 수묵화를 보는 것 같다. 이런 풍경을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저녁 노을이다. 해가 지리산 너머로 떨어질 때면 하늘 전체가 붉게 물든다. 도시에서는 높은 건물들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노을을, 이곳에서는 매일 감상할 수 있다.
어떤 날은 주황빛으로, 어떤 날은 붉은빛으로, 또 어떤 날은 보라빛까지 섞여서 하늘을 물들인다. 같은 노을이 하나도 없다. 매일 다른 색깔, 다른 모양의 노을이 펼쳐진다.
자영업을 하다 보니 저녁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운 편인데, 요즘은 노을 시간에 맞춰 일을 마무리한다. 노을을 놓치기가 아까워서다. 베란다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노을이 완전히 질 때까지 지켜보는 것이 하루 일과의 마지막이 되었다.
아침 풍경도 저녁 못지않게 아름답다. 해가 지리산 봉우리 사이로 떠오를 때면 온 산이 황금빛으로 물든다. 마치 신선이 살고 있는 산처럼 신비롭고 경건한 기분이 든다.
특히 구름이 봉우리에 걸쳐 있을 때면 더욱 환상적이다. 햇살이 구름 사이로 스며들어 산을 비추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 아침마다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행복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봉우리에 걸쳐 있는 구름을 보면 어릴 적 만화 '머털도사'가 생각난다는 것이다. 구름이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마치 머털도사가 구름을 타고 다니던 장면과 똑 닮았다.
어른이 된 지금도 그 만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며 혼자 미소를 짓게 된다. 어릴 적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신선 같은 삶을, 지금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체험하고 있는 것 같다.
구름이 산을 감쌀 때면 정말 신선이 나타날 것만 같다. 특히 새벽이나 저녁 무렵에 그런 생각이 더 강해진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들이다.
지리산 자락으로 이사 온 후 생활 리듬이 완전히 바뀌었다. 도시에서는 인공적인 시간에 맞춰 살았다면, 이제는 자연의 리듬에 맞춰 산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하루를 마무리한다.
자영업이라는 특성상 시간 조절이 비교적 자유로운 것도 큰 장점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일찍 일을 마치고 산책을 나서기도 하고, 비가 오는 날에는 창가에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일하기도 한다.
아직 1년이 안 되어서 모든 것이 새롭고 서툴다. 도시 생활에만 익숙했던 내게는 산촌 생활의 모든 것이 배움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 서툼마저 즐겁다.
예전에는 등산객으로만 잠깐 스쳐 지나갔던 지리산을 이제는 매일 곁에서 지켜보며 살아간다. 이 산과 함께 사계절을 보내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아직은 상상만 할 뿐이지만 그 기대감만으로도 충분하다.
지리산이 보여주는 매일의 작은 변화들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산의 진짜 모습들을 하나하나 발견해가는 재미가 있다.
이제 지리산은 내가 오르는 산이 아니라, 내가 기대어 사는 산이 되었다. 매일 아침 인사를 건네고, 매일 저녁 하루를 정리하며 바라보는 든든한 이웃 같은 존재다.
앞으로도 이 산과 함께 계절을 바꿔가며 살아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다. 예전에는 주말에만 만날 수 있었던 지리산을, 이제는 365일 곁에서 지켜보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여전히 꿈만 같다.
"산은 움직이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