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아, 안녕
창가에 앉아 이 글을 쓴다. 8월의 마지막 해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여름 내내 뜨겁게 달궈졌던 아스팔트도, 에어컨 실외기에서 뿜어져 나오던 열기도 이제 조금씩 숨을 고르는 것 같다.
8월이 가고 있다.
그렇게 기다렸던 여름이, 그렇게 원망했던 더위가, 이제 정말로 뒤돌아 손을 흔들며 떠나려 한다. 이상하게도 마음 한 켠이 아린다. 떠나는 것을 배웅할 때면 언제나 그렇듯,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이 목끝에 맴돈다.
이번 여름은 유난했다. 역대급 폭염이라는 뉴스를 하루가 멀다 하고 들었고, 온도계는 연일 40도를 웃돌았다. 밖에 나가면 숨이 턱턱 막혔고, 에어컨 없이는 견딜 수 없는 날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뜨거운 날들 속에서도 소중한 순간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7월 중순, 아이와 함께 동네 편의점에서 사먹은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뜯자마자 녹아내리기 시작했지만, 우리는 서로 보며 웃었다. 아이의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닦아주며 "엄마, 시원해!"라고 말하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그때는 몰랐다. 그 평범한 오후가 얼마나 특별한 시간이었는지를.
8월 초, 가족들과 함께 떠난 바닷가 여행. 새벽 5시에 출발해서 차 안에서 졸며 도착한 동해바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맨발로 모래를 밟던 그 감촉, 차가운 바닷물에 발을 담그며 느꼈던 짜릿한 시원함.
아이가 처음으로 파도를 무서워하지 않고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순간, 나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성장이라는 게 이런 건가 봐. 작은 용기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8월 중순, 갑작스럽게 쏟아진 소나기. 빨래를 걷느라 베란다로 뛰어나갔는데, 빗방울이 뺨에 닿는 순간 문득 멈춰 섰다. 얼마나 오랜만에 느끼는 시원함인지.
그날 나는 젖은 빨래를 안고 한참을 서 있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풀냄새를 맡으며, 여름비 특유의 무더위를 식혀주는 그 은혜로움에 감사하며.
올해 8월은 참 많은 걸 가르쳐주었다.
견디는 법. 에어컨이 고장났던 그 주말, 선풍기 하나로 버텨냈던 경험. 생각보다 인간은 강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물론 고쳐지고 나서 에어컨의 소중함도 배배 더 크게 느꼈지만.
소중함을 아는 법. 시원한 그늘이 얼마나 고마운지, 찬물 한 잔이 얼마나 달콤한지, 저녁 무렵 불어오는 바람이 얼마나 반가운지. 더위가 극에 달했을 때야 비로소 알게 된 작은 행복들.
함께하는 힘. 혼자였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무더위도, 가족과 함께하니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덥긴 하지만 그래도..."라며 서로를 위로했던 그 말들이 실제로 온도를 낮춰주었던 것 같다.
8월이 가면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분명 하고 싶었던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상 서랍에 꽂아둔 소설책. 올여름에는 꼭 읽겠다고 다짐했는데, 결국 첫 페이지를 넘기지도 못했다. 더위에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한 친구들. 안부 인사라도 해야지 하면서 미루고 미루다 벌써 8월이 끝나버렸다. 바쁘다는 이유로, 뭔가 특별한 소식이 있을 때 연락하자는 생각으로.
꾸준히 하려던 운동. 7월까지는 나름 잘하고 있었는데, 8월 들어 더위를 핑계로 하루, 이틀 쉬다가 아예 손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자책하지는 않으려 한다. 완벽하지 않은 여름이었지만, 그런대로 최선을 다한 여름이었으니까.
돌이켜보니 이번 8월은 나에게 참 많은 선물을 남겨주었다.
더위 때문에 일찍 일어나게 되면서 새벽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5시, 창문을 열면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새들의 지저귐.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는 그 신비로운 순간들.
새벽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의 여유로움이란. 세상이 깨어나기 전,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갖는 그 평온함을 알게 되었다.
복잡한 것들은 다 제쳐두고, 정말 기본적인 것들에서 행복을 찾게 되었다. 시원한 샤워, 차가운 음료, 에어컨 바람, 그늘... 일상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실은 얼마나 소중한 건지 깨달았다.
행복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더위에 지쳐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고 바닥에 발을 딛는 그 순간의 안도감, 그것도 충분한 행복이었다.
힘들다고 생각했던 일들도 결국 견뎌냈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매일 "오늘이 제일 더운 것 같다"며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나는 생각보다 강한 사람인 것 같다. 이번 여름이 그걸 증명해주었다.
이제 9월이다. 달력을 한 장 넘기면 가을이 시작된다.
선선한 바람. 아침저녁으로 불어올 시원한 바람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창문을 활짝 열고 자연 바람으로 잠들 수 있는 밤들.
산책의 계절. 8월 내내 더위 때문에 집 안에만 있었던 답답함을 9월에는 시원한 산책으로 풀어내고 싶다. 동네 한 바퀴를 천천히 걸으며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
독서의 재개. 집중력이 돌아오면 미뤄뒀던 책들을 하나씩 읽어볼 계획이다. 가을에 어울리는 소설 한 권쯤은 꼭 완독하고 싶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안부 전하기. 더 이상 미루지 말고, 9월 첫 주에는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들에게 안부 인사를 전해야겠다.
꾸준함 되찾기. 운동도, 독서도, 일기 쓰기도 다시 규칙적으로 해보자. 여름 더위에 흐트러진 생활 패턴을 조금씩 되찾아가면서.
감사 표현하기. 일상의 작은 행복들에 더 많이 고마워하기. 당연한 게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이번 여름이 알려주었으니까.
창밖이 어둑해지고 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집집마다 불이 들어온다. 하루가 저물고, 8월도 저물어간다.
8월아, 고마웠어.
네가 준 뜨거운 날들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그 안에서 많은 걸 배우고 느꼈다. 가족과 함께 웃었던 순간들, 혼자 견뎌낸 시간들, 작은 것에서 찾은 행복들... 모두가 소중한 추억이 되었어.
내일부터는 9월이겠지만, 너를 잊지는 않을 거야. 가끔 생각날 거야. 네가 남겨준 따뜻한 기억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게.
안녕, 8월. 안녕, 여름.
그리고 안녕, 9월. 안녕, 가을.
새로운 계절에도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아가겠다는 마음으로.
8월을 보내며 마음 한구석이 뭉클한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