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 뭉크의 작품 '태양'>
대학교 3학년 때 말 그대로 집이 '망해버렸다'. IMF 때 희망퇴직을 하셨던 아버지는 퇴직금에 무리한 대출금을 더해 전혀 모르던 분야의 사업에 통 크게 일을 벌이셨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끝은 창대했다. 어마어마한 금액의 빚이 생겼다. 드라마에서처럼 살고 있던 집과 가구들은 차압당했고, 이곳저곳 싼 월세를 찾아 전전해야 했다. 부모님들의 핸드폰에서는 늘 빚쟁이들의 전화가 쉬지 않고 울렸다.
다른 친구들처럼 이제 막 취업 준비를 시작하려던 철없는 대학생은 모든 게 막막해졌다. 집에 들어가면 늘 부모님이 싸우고 계셨고 학교에 있으면 걱정으로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어서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데. 가까운 친구가 아니면 상황을 말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창피하기도 했지만 이걸 이야기해봤자 누가 이해해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정말로 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한 끼에 1500원 하는 학식을 사 먹을 돈조차 없었다. 시간표를 빈틈없이 꾸역꾸역 채워 넣어 주 3일에 몰아서 짰다. 9시부터 6시까지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 하나 없는 연강. 그렇게 하면 학교 선후배에게 돈이 없어서 점심을 '못 먹는'것을 숨기고, 시간이 없어서 '안 먹는'것으로 포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인생에 이때만큼 비관적이고 나쁜 생각을 많이 했던 적이 없다. 큰돈을 벌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당시 매일 했던 생각이 '이런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였다. 내가 지금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이 고통을 죽을 둥 살 둥 이겨낸 들 그것이 내게 어떤 보상을 해 줄까. 누가 그걸 알아줄까. 다른 사람들은 그런 시기에 어떤 의미를 찾고 어떻게 이겨냈을까 늘 궁금했다.
에술가들 중에서는 살아서 부와 명예를 누리며 평화롭게 살다 간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다. 그중에서도 고통과 불안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화가가 아마 뭉크가 아닐까 싶다.
뭉크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이 '절규'다. 작품에 대해 많이 오해되는 부분은 작품 속 주인공이 절규를 하고 있다는 것인데, 사실 뭉크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들어보면 조금 다르다. 뭉크는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자연의 절규를 들었고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즉, 뭉크 자신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절규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귀를 틀어막는 모습이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사실 뭉크의 삶은 고통과 정신병, 죽음을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학대했던 아버지, 어머니를 대신했던 누이의 죽음, 여동생의 정신병원 입원... 그는 이루질 수 없는 불안한 사랑에만 목숨을 걸었고 광기에 휩싸인 연인에게 총을 맞은 적도 있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예술가는 세상을 불안하고 고통으로 가득 찬 곳으로 인식하며 살아갔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일관되게 불안과 공포, 두려움 같은 감정과 더불어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관계가 어두운 핏빛으로 그려진다. 그는 인간의 '불안'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고, 그 안에서 늘 갇혀있었으며, 그래서 필연적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 또한 집안의 내력이었던 정신병력을 피하기 어려웠다.
뭉크는 정신병원에 들어간 뒤에 본인과 같이 정신병으로 힘들어했던 작가들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당시엔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고흐의 작품을 발견했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눈부신 빛으로 그려냈던 그의 작품들에 탄복했다. 고통을 고통 그대로 그려냈던 그에게 고통 속의 희망을 발견한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는 작품에 변화를 주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온몸을 스며드는 공포와 불안이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때부터 그의 작품은 조금씩 변화해 간다.
뭉크가 그의 나이 50대에 오슬로대학교의 주문을 받아 그린 작품 '태양'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긴 겨울(노르웨이에서는 여름에는 내내 해가 떠있는 백야현상이, 반대로 겨울에는 해가 뜯지 않는 날이 며칠이고 이어진다고 한다)의 끝에 찬란하게 떠오르는 봄의 첫 태양을 그렸다.
이렇게 밝게, 찬란하게, 주변을 장악하듯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이 또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 태양은 밝게 빛난다기보다 주변을 밝혀내기 위해 자신의 가장 밝은 빛을 쥐어짜 내려는 듯 절박해 보인다. 태양이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것처럼 긴 겨울에 구석구석 남아있을 작은 눈덩이를 다 없애버리겠다는 듯이 말이다. 마치 뭉크가 길고 긴 고통의 삶에서 작은 희망을 움켜잡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것처럼.
뭉크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다.
나 또한 어두운 터널 안에 있지만 저 쪽 빛을 향해 계속 가고 있다고. 희망을 잃지 않으려 한다고, 끝끝내 노력할 거라고. 그래도 절망보다는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와인을 다룬 만화 '신의 물방울'에는 '좋은 와인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작가 아기 다다시 남매의 인터뷰가 있다. 작가의 이야기에 따르면 보통 최고의 와인이라고 불리는 와인들은 대부분 포도가 영글기 최적의 날씨였던, 즉 하늘이 도왔던 생산 연도(빈티지)에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작가가 좋은 와인으로 꼽았던 와인들은 포도가 익기에 최악이었던, 비와 된서리가 치던 해의 와인들이다. 작가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비와 된서리를 맞는 고통 속에서도 열매를 꼭 맺고 말겠다는 포도나무의 노력이 맛을 깊게 만들죠. 사람처럼 말입니다.'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버텨내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을까?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도 그때 그 일이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여전하다. 그때의 그 일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씩씩하게 극복해 내지 못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에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들의 일에 더 민감해졌다. 누군가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할 때 그 일이 참 아프다. 그 일을 겪어내야만 했던 참 약했을 영혼과 그것을 담담하게 말하기까지 생겼을 마음속의 수많은 굳은살들이 느껴져서.
어쩌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알아봐 줘야 하는 부분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그 사람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자신의 삶에서 어떤 된서리를 맞은 뒤에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그 이후에 그 따뜻한 눈빛이 외면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담담한 손끝이 어루만지는 곳은 어디인지. 그 모든 일의 끝에도 그들이 여전히 꿈꾸는 것은 무엇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