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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유 Jan 28. 2019

역사상 최초의 '진짜' 누드화

풀밭 위의 점심 by Edouard Manet 

 
지금 보시는 작품의 제목은 '풀밭 위의 점심'입니다. 말 그대로 풀밭 위에서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한 무리의 남녀의 모습이에요. 우리의 눈에는 크게 충격적일 것 없이 보이는 작품이지만 이 작품은 1863년, 프랑스 파리의 '낙선전'에 출품 되었을 때 사람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으며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던 작품입니다.
 
사람들은 이 작품을 지팡이로 때리고 오물을 투척하는 등 분노를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주최측에서는 작품을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구석방으로 옮겨야 했을 정도입니다. 도대체 이 작품은 왜 이렇게 사람들을 화나게 했던 걸까요?
 
이 작품이 사람들을 몹시 분노하게 했던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이 작품의 '크기'였습니다. 이 그림의 실제 크기는 가로 2.15미터, 세로 2.69미터에 달하는 상당히 큰 크기의 작품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을 본다면 아마 이 등장인물들은 거의 실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의 큰 크기겠죠. 그런데 단순히 크기가 큰 작품이란 것이 사람들의 화를 나게 했다는 것이 이상하죠? 이유는 이러했습니다.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이렇게 큰 크기의 그림의 주제란 대부분 '역사화'였습니다. 전쟁 영웅의 이야기라던가 역사적 사건같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교훈을 줄 수 있는 내용이었죠. 당시 사람들에게는 '큰 그림 = 교양 있는 그림' 이라는 공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누가 보아도 한낮에 남녀 여럿이 한담을 나누고 있는 시시한 광경을 주제로 잡았습니다. 더구나 여자는 옷을 다 벗고 있어서, 어찌보면 풍기문란처럼 보이기도 하는 장면을 떡하니 교양있는 그림처럼 그려놓았던 것이죠. 결과적으로 숭고한 주제를 그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역사화가들까지 모욕해 버리게 된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림의 '색'도 문제였습니다. 그림에서 여자의 몸을 다시 한번 봐주시겠어요? 여자의 몸은 전체가 아주 옅은 살구빛으로만 칠해져서 납작해 보일 정도로 음영이 거의 없습니다. 남자들이 입고 있는 어두운 색의 상의도 언뜻 보면 전체가 다 검정색으로 보일 정도로 세부적인 명암법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로 발전해 온 서양회화에서 '명암법'은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캔버스 위에 사실적으로 재현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법칙, 곧 '규범'과도 같았죠. 그런데 이 명암법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 그림이었습니다. 
 
붓질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를 봐왔던 당시 사람들에겐 이 그림이 상당히 거칠게 그려진, 미숙한 그림처럼 보였던 것이죠. (사실 저희에게는 여전히 잘 그려진 그림처럼 보이는 것이 함정이죠ㅎㅎㅎ)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가장 화나게 했던 것은 바로 여자의 시선이었습니다. 정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마치 관람객과 눈을 마주치는 듯한 여인의 날카로운 눈빛은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옷을 다 벗고 있음에도 전혀 부끄러워 하지 않는 여인의 당당한 눈빛은 마치 관람객으로 하여금 몰래 벗은 몸을 지켜보다 걸린 것 같이 '뜨금'하게 되는, 흡사 관음증 환자가 된 것 같은 아주 당혹스럽고 불쾌한 기분을 들게 했습니다.
 
작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느끼도록 철저히 의도했는데요. 작품의 엑스선 촬영 결과 원래는 이 여인이 본인의 옆에 앉아 있는 남성을 바라보도록 그려져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해요.
 
사실 이 작품의 전까지는 '누드화'라는 것에 대한 일종의 암묵적 합의가 있었습니다. 지체 높은 사람들이 보기에도 부담 없을 정도여야 했죠. 그래서 많이 그렸던 누드화가 바로 '비너스'나 '디아나' 같은 여신들입니다.
 
실제 모델을 놓고 벗은 몸을 그리더라도, 그들은 현실 속의 여인이 아닌 '여신'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림 속의 그녀들은 사뭇 부끄러운 듯 시선을 떨구거나 자신의 일에 집중해 있는 모습이었구요.
 
그런 당대의 사람들에게 전혀 미화되지 않은 현실 속의 여인이 옷을 벗고 시선을 당당히 맞추는 이 누드화는, 충격적이다 못해 화가 날 정도로 불편한 그림이었던 것입니다.
 
이 그림은 당시 미술계에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게 되었고, 작품을 그린 작가인 마네 또한 사람들의 입에 무수히 오르내리며 비난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후 근대 미술의 시작을 알리며 '인상주의'가 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주게 됩니다. 누드화를 보면서도 현실이 아닌 여신들의 모습이라고 여기던 당대의 가식을 벗겨버리고, 사람들의 눈을 진정한 '현실'의 여인으로 돌린 것이죠.
 
전혀 미화되지 않은 평범한 여인의 누드화를 그림으로서 이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는 최초의 '진짜 누드화'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회화의 주제가 더 이상 '아는 것'-신화나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보는 것'-내 눈앞의 현실-임을 보여주었던 첫 시도이기도 합니다.
 

가끔 우리도 너무나 파격적인 시도와 혁신이 있을 때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죠. 하지만 이러한 실험적이고, 새로운 시도를 통해서 인류와 역사가 꾸준히 발전 해 나가는 것은 아닐까요?




                                                                      " 자연에 '선'은 없다. 
                                                                   오직 서로의 옆에 위치한 
                                                                   '색면'들이 있을 뿐이다. "

                                                                       - Edouard M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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