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은 몽금포를 읽으며

한국 근대 수필 산책 2

by 김태진

늦은 오후, 창밖으로 흘러드는 빛을 따라 책장을 넘기다, 강경애의 수필 〈기억에 남은 몽금포〉를 만났다. 오래전 쓰인 글인데도 첫 문장에서부터 내 마음을 단숨에 잡아챘다.


“에그! 또 나온다. 또 숨는다. 그 빛이 왜 저리도 푸를까.”


짧은 감탄 속에 이미 한 폭의 그림이 그려진다. 도라지 꽃을 묘사한 대목이다. 심심산골에서 별만 보고 자란 소녀의 눈에, 바다의 푸른빛은 얼마나 놀랍고 그리운 빛이었을까. 그 푸름은 단순한 색이 아니라, 닿지 못한 하늘에 대한 동경, 가슴 깊은 수심(愁心)이었다.


나도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오래전 첫 여행지가 떠올랐다. 새벽 안개에 젖은 바닷길, 모래 사이로 수줍게 피어 있던 이름 모를 풀꽃. 그때 느꼈던 벅찬 그리움이 몽금포의 도라지꽃과 겹쳐졌다.


강경애의 글에는 자주 꽃이 등장한다. 겸손스레 피어난 도라지꽃, 붉은 피를 머금은 듯한 해당화. 꽃은 단순히 피고 지는 자연이 아니다. 삶의 상징이고, 애틋한 마음의 표지다. 도라지꽃은 수줍은 희망이 되고, 해당화는 바다를 향한 일편단심이 된다.


그리고 소리. 그녀는 소리를 참 다르게 들었다.

“묵은 솔잎은 봄비소리를 내고 떨어지오.”

“섬기슭을 찰싹찰싹 스치는 파도소리, 내 어머님의 입 속 노래보다 더 부드러우이.”


그냥 떨아지는 솔잎이 아니라 봄비 소리를 내면서 떨어진다는 기막힌 묘사다. 이런 감각이 글의 맛을 고고하게 만든다. 떨어지는 솔잎에 봄비를 듣고, 파도소리에서 어머니의 노래를 찾는다. 소리가 단순히 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적시고 지나간다. 나는 그 대목에서 오래전 들었던 외할머니의 자장가를 떠올렸다. 잠결에 들리던 낮은 음성이 파도소리처럼 부드럽게 다가왔다.


자연은 그녀의 글에서 늘 살아 있다. 다람쥐처럼 숨어 있는 도라지꽃, 어미개를 따르는 강아지 같은 섬들. 바람에 흔들리며 말을 거는 듯한 해당화까지. 자연은 그녀 곁에 붙어 앉아 말을 건네는 벗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다.

“내 비록 몸은 조그마나 맘이야 저 바다에 뒤지랴!”


몸은 작고 현실은 제약되어 있지만, 마음만은 끝없는 수평선처럼 뻗어나가고자 한다. 바다는 그녀에게 자유이고 해방이고, 억눌린 시대 속에서 단 한순간이나마 누릴 수 있는 무한의 공간이었다.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해당화는 더욱 선명하다. 눈처럼 흰 모래 위에 붉게 피어난 꽃송이. 그것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피를 뿌린 듯한 절절한 색채다. 사랑과 희생, 일편단심이 한 송이 꽃에 담겨 있다. 놀라운 필치다.


책장을 덮고 창밖을 바라본다. 유리창 너머 가을 햇살이 잠시 반짝이다가 숨어든다. ‘또 나온다, 또 숨는다’ 했던 강경애의 푸른빛처럼, 삶의 희망도 그렇게 숨었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기억에 남은 몽금포〉는 바다의 수필이면서 동시에 내면의 고백인 듯하다. 자연을 묘사하면서 자기 마음을 비추고, 빛과 소리와 색채로 삶의 갈망을 그려낸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그의 세계로 초대 받는다. 바다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내 마음속에도 언제든 파도가 있고, 솔잎의 노래가 울려오고, 해당화가 붉게 프로포즈를 한다.


오늘 나는 몽금포를 가지 않아도 그 바다를 본다.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