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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와 흑염소

원망할 수 없는 노새 (노새 두 마리 최일남)

by 희서

바닥엔 살얼음이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평소 온순하던 아버지가 보기 드물게 사정없이 노새를 몰아세웠다. 눈이 뒤집힐 듯 악을 써대는 노새의 발굽이 살얼음 위를 긁어댔지만, 마차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가파른 언덕 중턱에서 연탄을 실은 마차는 결국 멈춰 섰고, 이내 뒤로 밀려날 기세였다. 아버지는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바로 그때, 마차가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연탄 더미가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지며 굴러갔고, 화들짝 놀란 노새는 그 틈을 타 달아나 버렸다.


"어 어, 내 노새, 내 노새."


노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아주 멀리 내달렸다. 자유를 찾은 양, 더는 이 고단한 삶을 견디지 않겠다는 양, 온 힘을 다해 달아났다.



시아버지는 육 남매 중 다섯째, 아들 중에서는 셋째였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많지 않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밭일에 매달리며 누구보다 성실한 농부로 살아오셨다. 자식 중 그 누구도 선뜻 어머니를 모시겠다는 이가 없어, 당신은 으레 그래야 하는 일처럼 할머니를 모셨고, 몇 해 전 작고하시기까지 곁을 지켰다. 시아버지는 순박하고 성실한 농부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 자랑이라면 단연 큰아들이었다. "험한 일 안 하려면 공부혀." 그 한마디에 남편은 이를 악물고 책상 앞에 앉았다고 했다. 한 번씩 농사일을 도와드릴 때면, 세상에 이보다 더 고된 일이 또 있을까 싶어 이를 바득바득 갈며 공부했다고 했다. 그렇게 일군 성과였고, 아버지에겐 자부심이자 영광 그 자체인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의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도, 어쩌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이혼 가정에서 자라, 동생 둘을 둔 장녀. 그 고단한 삶의 사슬을 아버지는 아들 대에서는 끊고 싶었을 것이다. 그 바람이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했던 마음인 성싶다.



노새는 정처 없이 달려갔다.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바닥에 자빠졌고, 재잘거리던 아이들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번화가에서 시장으로 노선을 바꾼 다음엔, 온갖 것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시금치가 흩어지고, 날치가 날아다니고, 밀감은 짓이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새는 쉬지 않고 달렸다. 연탄 짐을 메지 않은 몸이 하늘을 날 듯 가벼웠다.


'나'의 걱정은 사실 노새보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노새가 사라진 날,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밥 한술 뜨지 않고, 말없이 방바닥에 그대로 벌렁 드러누워 버리셨다. 당장 내일의 생계보다도, 노새를 잃은 상실을 꾹꾹 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노새는 그저 일꾼이 아닌, 함께 땀 흘려온 동료이자 가족이었다.


내가 바란 이혼이 아니었고, 내가 바라서 장녀로 태어난 게 아니었는데, 그 시절엔 많이도 억울했다. 이혼 가정에서 막돼먹게 자랐단 소리 안 들으려고, 철저히 나를 단속하며 살아왔다. 책임감 있게 행동했고,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살아왔다. "언니 하루는 48시간인 것 같아. 참 부지런하다니까." 가끔 그런 우스갯소리를 들을 때면, 나도 웃으며 말했다. "어렵게 살아와서 그런가 봐."


그 시절, 그렇게 살아낸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경찰이 찾아왔다. 노새가 이리 날뛰고, 저리 날뛴 탓에 여기저기서 피해를 봤다는 것이다. 도로교통법 어쩌고 하며, 아버지를 잡아넣겠다는 으름장까지 놓았다. 앞으로는 당신 자신이 노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골목길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또 한 마리의 노새처럼 보였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운데 아버지는 그 틈을 비집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시아버지가 염소를 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몇 달 전이었다. 어머님 생신을 맞아 시댁에 내려갔을 때, 낯선 기척이 느껴져 집 뒤편으로 돌아가 보았다. 그곳엔 두 마리의 아기 염소가 어미 곁에 꼭 붙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어미 염소는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나를 다보았다.


"염소는 어떻게 기르게 되셨어요?"


"니네 아부지가 적적했는가벼. 장에서 두 마리 데려왔는디, 일주일 만에 새끼를 낳아부렸네. 쟤네 먹이느라 니 아부지 허벌나게 바뻐. 요즘."


시아버지가 기르는 염소


새끼를 밟을까 봐 수놈은 따로 뒀다는 어머님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시아버지의 염소 사랑이 짐작됐다. 한때는 고집 하나로 버텨오던 그 단단한 성미가,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았던 그 불통의 언어가, 이제는 부드럽게 닳아 있는 듯했다. 세월을 이길 장사는 없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밀어내고 나와 결혼했다. 강하고 곧기만 하던 그 심지는 아들 내외가 살림을 꾸리고 조금씩 뿌리를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서서히 녹아내렸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쌓였고, 시아버지는 어느덧 일흔을 훌쩍 넘겼다. 나도 이제 마흔 중반에 들어섰다. 한때는 당신 아들 아끼는 마음에 남의 딸 가슴에 비수를 꽂던 아버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눈물로 보내던 시간이었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던 그 감정도 시간이 쌓이자 조금씩 희석되었다. 아버님이 기르는 염소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마음이 저릿해 왔다. 저 염소는 아버님에게 어떤 의미일까. 쓸쓸한 시간을 견디게 하는 벗일까, 달아나도 원망할 수 없는 한 마리의 노새일까?


단편에서 건져 올린 한 줄기 개똥철학

세월은 고집을 깎아내리고,
그 틈에는 연민이 스며든다.
비로소 서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글은 노새 두 마리(최일남) 단편소설과, 제 시아버지 이야기를 교차로 작성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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