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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드나잇 Apr 30. 2016

2016년 4월 26일, 광화문

한시적 자유부인의 점심 산책 다섯째 날

월말이 되면서 처음 점심 산책을 시작했을 때처럼 청명한 하늘을 보기가 조금 어려워졌다. 최근에 비도 몇 번 오면서 흐린 날이 계속되기도 했고, 미세먼지와 황사도 조금 있었고. 오늘은 미세먼지가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쨍한 하늘이 아니어서 딱히 오래 걷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늘보다도 내 마음이 심란해서였을 것이다.




수족구라는 전염성 질병, 내가 어릴 땐 없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첫째가 증상을 보이더니 덩달아 둘째까지. 양가 부모님께 아이들을 부탁하고 출근을 했지만 어째 경황이 하나도 없다. 주말까지만 해도 멀쩡해 보이던 아이들이... 내 관심과 정성이 부족했던 걸까. 대체 지금껏 멀쩡하다가 왜 갑자기 걸린 걸까. 심지어 수포 때문에 첫째는 그렇게 좋아하는 초콜릿도 거부하고 아무것도 먹질 않고 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렇게 오래 걸을 기분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팀원들과 밥을 먹고 싶은 기분도 아니어서 교보문고에 가기로 했다. 나도 나지만, 기운이 쭉 빠져 있을 첫째를 생각하며, 아이가 좋아하는 에릭 칼의 <배고픈 애벌레> 책을 살 요량으로. 돌 무렵에 페이퍼백으로 된 책이 있었는데, 아직 아기 때라 알록달록한 그림을 좋아는 해도 아직 책이 뭔지 몰라 물고 빨고 구기고 찢어져 결국 버려졌는데, 요즘 어린이집에서 선생님이 이 책을 읽어주고 있단다. 집에서도 몇 번 애벌레 얘길 해서, 그렇잖아도 양장본을 새로 사서 무릎에 앉히고 읽어줘야지, 생각하다 깜빡하고 못 사고 있었는데, 이렇게 아이가 안쓰럽고 짠한 순간이 되어서야 행동하는 내 패턴이 참 갑갑하기도 하고. 기분이 영 그렇다.




걷는 걸 생활화하지 않았을 때는 이만한 거리면 꽤 멀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교보문고까지는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큰 횡단보도를 세 개나 건너야 하는 환경을 감안하면, 신호 대기 시간을 뺀 실제 걷는 시간만 따지면 더 조금밖에 걸리지 않을 듯하다. 걸음이 빨라진 건가? 여하튼 이 정도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게 됐다.


오랜만에 찾은 서점이지만 분위기는 여전했다. 새로 나온 하루키 에세이에도, 침묵의 기술이라는 심플한 표지를 한 책에도 눈길을 주었다가 본래의 목적인 동화책을 사러 유아동 코너로 갔다. 사실 아직 아이들을 서점에 직접 데려온 적이 없어서 아이들의 책을 고를 때는 오로지 내 기준에 의해 사게 되는데, 은연중에 이렇게 내 취향과 가치관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좀 더 신중하게 고르려고 한다. 조금 더 크면 직접 자기들이 원하는 책을 고르도록 해야겠다.


원래 사려던 에릭 칼의 <배고픈 애벌레>를 얼른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가려는데, 어디선가 얼핏 들은 사노 요코의 <백만 번 산 고양이>가 눈에 띈다. 과연 아동용인가 싶게 시니컬하다가 울컥하는 순간이 있는 책이었는데, 표지에 그려진 고양이 표정이 정말 딱 시니컬하다. 이건 그냥 나를 위해 샀다. 그렇게 위로가 필요한 날이었다.







2016년 4월 26일 오후 12:00, 1.36Km,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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