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판)오후 4시의 잔혹한 사랑

단편 소설

by 시sy

가장 완벽한 불륜 상대가 내 아내라면? 매번 기억을 리셋하고 자신의 아내를 '낯선 여자'로 착각해 다시 유혹하는 남자.


인생에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다만 모르고 있을 뿐. 그러나 당면하면 알게 된다. 바로 이거였구나. 이렇게 뒤통수를 치려고 여태껏 음흉하게 숨어 있었구나. 이게 끝이 아니겠구나. 나는 또 당하고 절망하겠구나.

오후4시.jpg

그녀의 딱 두 가지 얼굴만 기억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처음과 마지막이다. 아직은 찬바람이 매서운 봄학기가 시작되는 3월 첫째 주 시들해진 담쟁이가 건물외벽을 감싸고 있는 오래된 건물 강의실 301호, 그녀는 지각생이었다. 교수님은 첫 시간부터 늦게 들어온 그녀를 알고 있는 눈치였고 별로 타박하지 않았다.

나는 모르는 여학생이었다. 그녀의 상기된 얼굴은 강의에 늦지 않기 위해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얼마나 뛰어왔는지를 보여줬다. 대학원 세미나 수업으로 디귿자 테이블에 둘러앉았기 때문에 눈치 보지 않고도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긴 머리, 단정하게 정리된 짙은 눈썹, 하얀 피부, 라이트 핑크 립스틱.

그녀의 발표시간을 기다렸다. 자, 너의 목소리를 들려줘! 그녀는 첫마디를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는데 그때 눈이 처음 마주쳤다.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히 내 눈을 응시하며 입술을 열더니 중저음의 한 문장을 말했다.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게 나에게 던진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목소리 마음에 들어? 그러면 수업 끝나고 나에게 커피를 사줘. 아무 커피 말고, 이 날씨에 정확히 어울리는 제대로 된 커피로.

"커피 좋아해요?"

처음 만난 내가 말 걸었지만 그녀는 자연스레 답했다.

"좋아하기는 하는데.."

머뭇거린다. 의도적 망설임이지?

"드립커피 잘 내리는 집 알아요. 멀지 않은데."

"1시간 뒤에 수업이 있어서. 혹시 가까울까요?"

"충분해요."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번째 수업에도 지각했다. 그정도는 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 내 인생이 틀어졌다. 정상궤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올곧게 달려왔던 내 삶의 궤적은 그녀를 만나고 일탈했다.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자부했기에 항상 자신만만했다. 자만이었다. 나는 몰랐다. 내가 정확히 좋아하는 여자가 어떤 여자였는지 몰랐고, 그 여자에게 얼마나 빨리 빠져드는지 전혀 알 수 없었으며 이토록 무방비일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널 좋아해."

"그럴 줄 알았어요."

"괜찮아?"

"뭐가요?"

"내가 너 좋아하는 거."

"괜찮고 말게 있나요? 그건 자기감정이잖아요."

하긴 자기감정은 자기 알아서 하는 거지. 그녀는 나보다 어려도 항상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 맞는 말을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때때로 나는 용기가 없다. 그 맞는 말이 상처를 줄까 두렵다. 나에게.

"사소한 문제와 사소하지 않은 문제가 있어."

"문제가 많네요."

"사소한 문제는 결혼할 여자가 있어."

"짐작했어요. 그 정도가 사소하면 사소하지 않은 문제는 뭘까요?"

"너와 헤어지기 싫어."

"흠. 확실히 문제네요. 그건 천천히 해결해 보죠."

나는 언제나 계량화되지 않는 말들을 싫어했다. '다소'라든가 '적당히' 같이 의미조차 애매한 것들은 일상어에서 퇴출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바뀌었다. 천천히? 그래 천천히, 나는 얼마나 천천히 헤어질 수 있을까?

그녀의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자부한다. 처음 저녁 먹던 날 내가 받아 든 베이지 양모코트의 목 언저리에서 슬쩍 보였던 브랜드 이름은 Heim, 그녀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Heim의 독일어 뜻은 '집으로'이다. 그날 그녀와 집으로 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던 것은 순전히 Heim 때문이었다.

처음 함께 마신 와인은 교황의 와인이라 불리는 '샤또 네프 뒤 파프'였다.

"종교 없잖아요. 웬 교황?"

"그렇지. 그렇지만 와인은 마시니까.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죠. 맛있어요."

"거봐."

그리고 그녀가 나를 처음 바람 맞힌 날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백 가지도 더 생각했지만 정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끝이 정해져 있는 건 싫어요. 전 드라마도 중간 정도밖에 못 봐요. 대충 어떻게 끝날지 알게 되거든요."

"대부분 끝이 정해져 있지 않나?"

"아닌 것도 있죠."

"예를 들면?"

"사랑?"

그녀가 뭘 말하고 있는지 알았지만 끝까지 모른 체했다. 그녀는 내가 모른 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까? 때문에 왜 생일날 나를 바람 맞혔는 지도 알 수 없었다.

바람맞고 한동안은 겁이 나서 먼저 연락하지 못했다. 벌써 이별일까 봐. 그녀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의 대학원 졸업날에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만났다. 오늘이 천천히 헤어지는 마지막 날이라고 체념하면서.

"대학원 졸업 축하해."

"감사. 그런데.."

"왜? 기쁘지 않아?"

"그보다 선배는 졸업 안 할 거예요?"

"나? 나야 학위 때문에 다닌 건 아니었으니까."

"알지만, 아깝잖아요."

"소기의 목적을 이뤘으니까 괜찮아."

"목적이 뭔데요?"

그녀는 알면서 물었다.

"교수들도 많이 사귀었고 교육 나온 공무원이나 다른 회사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됐고. 이 정도면 충분해."

어차피 그러라고, 대관 업무에 보탬이 되라고 뒤늦게 회사에서 보내준 대학원이었다.

"그게 다예요?"

"그럼 뭐가 있는데?"

"있을 텐데.. 잘 생각해 봐요.""아니야.""뭐가요?"

"네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라고.""진짜?"

"아니야. 그거 너 자신감 과잉이야."

"네. 네. 그러시겠죠."

원래는 두 학기만 다니기로 했던 대학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졸업할 때까지 4학기를 풀로 채웠다.

"더 마실래?"

"여기서요?"

"와인은 더 마셔봐야 취할 것 같지도 않고 더 독한 걸로 마실까?"

"괜찮겠어요?"

아무것도 괜찮지 않았다. 천천히 헤어지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끌면 얼마나 늘일 수 있을까? 빛의 속도로 달리는 술집이 있으면 좋겠다. 시간이 천천히 갈 테니. 그러나 이별의 순간은 착실히 다가왔다. 술병에 남은 마지막 위스키를 잔에 따르며 물었다.

"이제 끝인가?"

"그만 마셔야죠. 지금 우리밖에 없어요."

"그거 말고."

"졸업했으니 취직해야죠."

"그거 말고."

그녀가 애매하게 웃었다. 저 미소의 의미는 무엇일까? 난 죽을 때까지 모르겠지?

"결혼식 언제예요?"

저녁 시간 내내 그 생각을 했던 것인가, 내 결혼? 난 잊고 있었는데. 그녀의 얼굴만 보고 있었는데.

"3주 후."

"토요일?"

"설마 오려고?"

"고민 중. 그래도 청첩장은 줘요."

"싫은데. 그냥 비밀로 해줘."

"이미 아는데 어떻게 비밀로 하지?"

"그럼 모른 체해주면 안 될까?"

"말해봐요. 내가 뭘 해주면 좋겠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녀에게 바란 것은 늘 하나였다. '내 옆에 있어줘.'

"이건 선물."

몇 달 전부터 준비했었던 손목시계를 졸업 핑계로 내놓았다. 반지는 말도 안 되고, 목걸이나 팔찌도 부담스럽고, 매일 지니고 다니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정도의 가격으로 적당한 선물. 그러나 그녀는 풀어보지도 않았다.

"이건 제 선물."

그녀의 입술이 예고 없이 내 입술에 닿았다. 첫 키스였다. 내 생애 최고의 키스에서는 글렌 모린지 18년 싱글몰트 위스키 맛이 났다.

결국 '천천히' 이별도 실패했다. 결혼 후 잠시 연락을 끊고 지냈지만 그녀의 생일을 핑계로 축하메시지를 보낸 게 화근이었다. 저녁을 같이 먹게 됐다. 6개월 만이었다. 계획은 아니었지만 원했던 일이었다.

"생일 축하해."

"이제 생일에만 만날 수 있는 건가요?"

또 애매하게 웃는다. 미치겠다.

"취직했지? 회사는?"

"재밌어요. 결혼은 어떤지 물어보면 실례일까요?"

"실례야."

"넵. 그럼 뭘 물어봐야 하나. 회사는 잘 다니고 계실 테고. 학위는 안 딴다고 했고. 모르겠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 딱 싫었다. 일어서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한다. 난 뭐 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말없이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미디엄으로 익힌 안심에서 붉은 육즙이 빠져나오며 나이프를 조금 붉게 물들였다. 포크로 누르듯 찔러 입에 가져다 넣는다. 조명을 받아 반질거리는 입술이 오물오물,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넌 뭘 하고 있니?

"나도 결혼이나 할까요?"

숨이 턱 막혔다.

"누구하고?"

"아무 하고나."

"후회한다."

"경험담인가요?"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말을 안 하니 속을 모르고, 말해도 거짓말인지 알 수 없으니 그녀의 속내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알고 싶었다. 날 좋아하기는 하는 거니?

"좀 늦은 감은 있지만 내가 이혼할 게."

"헐, 그런다고 내가 결혼해 줄 것 같아요?"

"후보는 될 수 있겠지. 아니야?"

"됐어요. 가정 파괴는 사절입니다."

"진심인데."

"알아요. 그래서 싫어요."

그날 저녁 대리운전으로 귀가하는 길에 조금 울었다. 기뻤다. 적어도 나는 진짜 사랑을 한다.

한동안은 일만 했다. 일 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 생각은 강력한 금기였다.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못할 짓이다.

그리고 이혼을 다짐했다. 내 이혼이 그녀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선행 조건임은 분명했으니까. 그럼에도 불안했다. 이혼했는데 그녀와 결혼 못하면 어떡하지?

그녀와 만났던 모든 순간을 몇 번이고 되감아봐도 전부 정황뿐이었다. 그녀는 한 번도 고백하지 않았다. 사랑은커녕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다. 키스했으니 좋아한다고 믿을 뿐이다. 그 키스를 기억하기나 할까? 술 취해 벌인 단순한 해프닝이라면?

"그날 기억해? 있잖아. 우리 술 진짜 많이 마셨던 날."

"그럼요. 진짜 행복했었죠."

그렇게 쉽게 행복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뭐가 행복했다는 것인지 몰라 답답했다. 키스가? 위스키에 취한 게?

"오늘부터 정확히 10년 후에 여기서 만날까?"

"10년이요? 와, 진짜 멀다."



그날 이후 딱 10년만 그녀를 잊고 살려고 했다. 겨우 10년뿐이니까. 그녀를 잊기 위해서는 시간을 잊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관련해 떠오르는 건 뭐든지 잊으려 하다 보니 기억나지 않는 게 많아졌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난 게 언제였지? 다이어리를 꺼내 그녀를 만났던 날들을 찾아봤다. 기록이 끊겼다. 마지막 만났던 날이 무려 1년이 다 돼 간다. 정말 1년이 지났다고?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만나고 기록하는 것을 잊은 게 아닐까? 난 그런 걸 잊는 사람이 아니다.

"생일 축하해."

"...."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한다. 조금은 화난 것 같다.

"미안. 너무 연락을 안 했지? 한 1년 됐나?"

"그렇게 생각해요?"

"더 됐어?"

"됐어요. 이번에는 뭘 축하할까요?"

"생일 말고?"

"네. 생일 말고요."

그녀가 원하는 답은 뭘까? 내가 주고 싶은 답은 뭘까? 둘의 교집합이 있을까?

"나 이혼하려고."

나름 고민하고 한 말인데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무한정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거의 5분 동안 입술을 깨물고 있던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결혼했어요."

"누가? 네가?"

"그런 셈이죠."

결혼했다고? 했다고 말하니 믿는 수밖에 없지만 믿기지 않았다. 특히 '그런 셈'은 뭐란 말일까? 허무하다. 어떻게든 이혼하려 애썼던 것들이 무의미해졌다. 하긴 그녀는 한 번도 나를 기다리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나와 결혼하겠다는 말도 한 적 없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그렇다.

"좋아?"

물으면서도 제발 '좋지 않다'는 답을 하길 기다렸다.

"어때 보여요?"

"좋아 보여."

거짓말이다. 좋아 보인다고 하면 '틀렸다'라고 답하길 기대하는 유도멘트였을 뿐이었다.

"나만 좋으면 뭐해요?"

"무슨 소리야, 남편이 싫다고 해? 그 남자 얼굴 한번 보고 싶네."

"...."

"영화배우처럼 잘 생겼어?"

"아뇨."

"재벌이야?"

"설마요."

"그럼 왜 결혼했어?"

"그러게요. 이럴 줄 몰랐다고 해두죠."

"후회해?"

"후회는 안 합니다요."

"왜?"

"글쎄요. 왜일까요? 그냥 슬퍼서?"

그녀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조금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최소한 이제 공평하네."

"둘 다 결혼했으니까요?"

"그런 셈이지."

그녀 말투를 따라 했다. 말하고 보니 훌륭한 대답이다. 그렇다고 답하면서 다르게 생각해도 상관없다는 말투. 그런 셈.

"그럼 좀 더 자주 볼까요? 서로 공평한 처지인데."

"난 좋아. 괜찮겠어?"

또 따라 했다. '괜찮겠어?' 난 강요하지 않았다. 나중에 후회해도 네 책임이다.

"그럼요. 누가 뭐라 하겠어요?"

우리는 최소한 합의된 관계로 업그레이드됐다. 그날은 잠시 기분 좋았다. 헤어질 시간이 되니 역시나 우울했지만.

"12시 넘었다. 들어가야 하지?"

"상관없어요.""남편이 기다리지 않아?"

"글쎄요. 내가 기다린 날이 더 많았던 것 같은데."

"그래서 이번엔 기다리게 만들겠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좋아요?"

"뭐가?"

"나하고 있는 거."

"당연하지."

"부인에 대해 물어보면 실례일까요?"

"뭐가 궁금한데?"

"어떤 사람이에요?"

"좋은 사람이야."

"그게 다?"

"응. 좋은 사람."

"나는요?"

"넌, 모르는 사람."

고르고 골라 그녀를 가장 아프게 할 수 있는 말로 답했다. 나도 한 번쯤 그녀에게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도 뭣도 아니고 마땅한 호칭도 없다면 이게 최선이었다. 너를 상처 준 사람. 아프게 한 사람.

"와. 이건 좀 아프다. 날 왜 모르는데요?"

"대답을 늘 애매하게 하잖아."

"다시 물으면 되잖아요."

"기분 나쁠까 봐. 내가 약자였으니까."

"약자? 아, 유부남이어서? 그럼 이젠 약자가 아니라는 거죠? 공평해졌으니까."

"그러면 좋고."

"좋아요. 나에게 제일 궁금한 게 뭐예요?"

몇 년을 기다려 가장 원했던 순간이 왔다. 이제야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날 좋아해?"

"겨우 그거였어요?"

겨우 그거라니 너무 당연한 것을 물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내 질문이 하찮다는 것일까? 우리 관계에 있어서 이것만큼 중요한 게 있기나 한가?

"겨우 그거라도 답해줘. 날 좋아해서 만나는 거야?"

"좋아하면요, 뭐가 달라져요?"

"거봐. 또 회피하잖아. 나 힘들게."

"아, 이런 게 힘든 거구나. 이렇게 힘들게 했구나."

나를 바라봤다. 진심으로 동정한다는 눈이다.

"좋아해요. 아주 많이 좋아했어요."

'좋아해요'인 줄 알았는데 '좋아했어요'라는 과거형이 진짜다. 과거형이라는 건 늦었다는 말이다.

"지금은 아니고?"

"모르겠어요. 애매하게 말해서 힘들게 하고 싶지 않은데 내 마음을 모르겠으니까."

그녀는 애매할지언정 언제나 솔직했다. 솔직해서 마음에 들었고 나는 상처받았다.

"할 수 없지. 타이밍이 안 맞는 건데. 언젠가 맞을 때가 있겠지. 그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맞은 적 있었는데."

"언제?"

"기억 안 나죠?"

그날의 헤어짐은 여느 때와 달리 꽤나 희망적이었다. 내 머리 속에는 자주 보자고 했던 그녀의 말이 반복해서 맴돌았다. 만나서 뭘 할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생일이나 졸업식 같은 핑계 없이도 만남을 허락받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유부남과 처녀의 만남에서 유부남과 유부녀의 만남은 상황이 나아진 것인가? 우리는 어디까지 뭘 더 할 수 있을까? 공평해졌다고 거리낄 게 없다는 것은 아니다. 더 조심해야 하나? 이제 자칫하면 하나의 가정이 아니라 두 가정이 파괴된다. 그리고 우리는 가정파괴 공범이 될 것이다.

이게 뭐야? 가정파괴라니?

세상은 너무 많은 것을 금지하고 있다. 나는 내 삶이 가장 애틋한데 못하는 게 왜 이리 많을까? 딴 여자 만나는 게 범죄는 아니지 않나? 여전히 나는 약자다. 알고 보니 사회적 약자다.

늘 같은 생각이 돌고 돈다. 비슷한 생각이 아니라 완전히 똑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머물고 있는 느낌이다. 이럴 수도 있나? 지금 이 생각도 이미 했던 것 같은데. 원래 하지 못하는 것, 금지된 것은 곱씹어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다 운명의 10월이 왔다. 옛날부터 생각했지만 10월은 30일까지만 있어야 했다. 시월의 끝은 30일이 어울리지 않나? 31일은 미련이 남는다. 질척거리는 것 같다. 그래서 난 시월의 끝이라면서 30일에 만났다.

"남편 얘기 좀 해봐."

"갑자기?"

"내 경쟁 상대가 누군지 알아야지."

"후후, 경쟁이 될는지."

"좋은 사람이야?"

"나한테만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좀. 관심 없어요.""너한테 집착해?"

"그런 편이죠."

"그건 좋은 거 아닌데."

"알지만 나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뭐라 하기는 싫네요."

"다른 건. 취미라든지. 직업은?"

너무 집요한 것이었을까? 그녀는 대답 않고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또 그 눈이다. 연민이 가득하고 아련하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면 저런 눈이 될까?

"집 나간 사람 얘기는 그만하고 싶은데."

반가움에 놀랐다.

"별거 중이야?"

"네."

"얼마나?"

"좀 됐어요."

"그걸 왜 이제 말해?"

"알고 있는 줄 알았죠."

"내가 어떻게 알아?"

대답 않는다. 사실 대답을 바라고 말한 것도 아니었으니 나도 멈췄다.

"술 더 할까?"

"그만해요."

"왜?"

"몸에 안 좋잖아요."

"언제는 안 그랬나?"

"요즘도 병원 가요?"

말문이 막힌다. 병원 다녔다는 말을 했었나? 기억나지 않는데.

"기억 안 나는데."

"그것도 기억 안 나요?"

"그 말이 아니라 병원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어떻게 알았어?"

"그것도 기억 안 나면 할 수 없고."

그녀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럴 수 있나? 다른 것은 그럴 수 있다. 늘 하는 일, 무심코 반복적으로 하는 일, 일상적인 대화 이런 것들은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와 했던 대화, 함께 했던 추억은 내 기억의 별도 공간에 저장돼 있다. 그 공간이 통째로 사라지지 않는 한 개별적인 기억이 없어 질 수 없다. 얼마나 소중한 기억인데 그걸 잊는다는 말인가?

다른 가설도 가능하다. 그녀가 거짓말하는 것이다. 왜?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 그녀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아니다. 정말 그녀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나? 나도 인정했다. 그녀는 모르는 사람이다. 거짓말 할 수 있다.

"맞아. 요즘 내가 좀 그래. 머릿속이 복잡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생각 안 하다가 생긴 부작용 같은 건가 봐. 말했지? 난 항상 모든 상황을 시뮬레이션한다고. 그러다 보니 안 해도 될 생각을 하고 걱정만 많아지고 불안하고 그래서 생각을 회피하는 버릇이 생겼어. 그래도 너한테 말한 것을 잊지는 않았을 텐데. 상관없어. 그런데 네 별거 사유는 뭔데?"

실수했다. 아무리 궁금해도 이런 사적인 질문을 하다니. 그녀가 화를 내도 별 수 없다. 당연히 대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몰라요. 그냥 집을 나갔어요."

"진짜? 그래도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집 오는 길을 잃어버렸나 보죠. 아니면.."

"아니면?"

"날 잊었거나."

농담이냐,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농담이라도 슬프다. 게다가 그녀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조금은 슬퍼 보인다. 그러다 '슬퍼 보인다' 생각하니 질투가 생겼다.

"보고 싶어?"

"아뇨."

집 나간 남편을 보고 싶지 않다는 단호한 부정에, 안도하는 나는 얼마나 한심하냐.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도 혼자 살아."

또 공평해졌으니 그녀가 좋아할 것이라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계속 무표정하다. 그 사실도 알고 있나? 내가 말했나? 그럴 수도 있겠다. 나는 이제 내가 말한 것도 기억 못하는 사람이니까.

"별거 중인 사람끼리 건배."

그녀는 잔을 들지 않았다. 나 혼자 잔을 들었다가 그냥 내리지도 못하고 마시는 척만 했다. 윗입술에 조금 묻은 와인의 끝맛이 텁텁하다. 와인병을 보니 바닥이 보였다. 와인을 끝까지 마시다니. 세상에는 끝까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와인을 밑바닥까지 마시는 것이다.

또.. 사랑이 그렇다. 끝까지 간 사랑은 진짜 끝장을 보여준다. 나 역시 그랬다. 내가 그랬나? 그럴지도. 혹시 아직 진행형일까?

"처음에는 날 떠난 이유가 궁금했어요. 그러다 화가 났어요. 뭐 대단한 이유길래 문자 하나 없이 사라지나. 그래서 먼저 연락 안 해요. 화나서."

"회사는? 회사는 갈 거 아니야."

"잘 다니고 있대요."

"그럼 찾아가 보지?"

"내가요? 왜요?"

그녀의 이야기가 거짓말처럼 들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기면 그렇게 떠나버릴 수 있지? 그녀가 마음에 안 드나? 아내로 매력이 없나? 아니다.

내 앞의 그녀는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 움직이는 것만 봐도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이런 그녀를 남겨 놓고 말 없이 떠날 수 있다니.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어떤 놈이?

"화나려 하네. 회사 잘 다니는 거 맞아? 사고 난 거 아니야? 교통사고라든지. 그럴 수 있잖아."

"아뇨. 멀쩡하게 살아 있어요."

"어떻게 알아? 봤어?"

"하긴 완전히 멀쩡한 건 아니겠죠. 날 잊었으니."

사생활에 너무 많이 끼어든 것일까? 그녀는 죄 없는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죄가 없지 않다. 죄가 있다. 다 내 잘못이다. 무슨 자격으로 남의 부부 생활에 대해 물었다는 말인가? 그녀가 화를 내면 모두 내 잘못이다. 우리는 그런 관계다. 모든 잘못은 나의 것으로. 비로소 우리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만해요. 우리."

(계속)


안녕하세요. 시sy입니다.

이곳(브런치)은 너무 개방되어 있어, 제 글의 밀도를 온전히 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앞으로 집필될 연재소설《종이달 살인》《용의자X》, 에세이 《우아한 뇌를 위한 유해한 교양》등 심층적인 스토리와, 다소 날카로울 수 있는 사적인 에세이는 프라이빗 뉴스레터를 통해서만 소수의 분들에게 보내드리려 합니다.

앞으로 메일리 서비스를 통해 이웃 브런치 작가님들과 상호 업그레이된 신뢰를 쌓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구독을 원하시는 분은 링크를 클릭해 받으실 이메일 주소를 입력해 주십시오.

프라이빗 메일로 발송할 첫 번째 스토리는 <오후 4시의 잔혹한 사랑> 전편입니다.

감사합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너는 나와 다르지 않다. 다르게 느낄 수 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