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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n 15. 2023

(단편소설) 세계 5분전 가설

2021 예술세계 신인상 당선 작품


첫날. 수요일.

내일이 오지 않을까 걱정하며 잠든 적이 있었다. 잠든 사이에 죽는 건 아닐까, 혹은 잠든 사이에 세상이 멸망하지는 않을까.. 아침에 일어나면 눈이 보이지 않을까 걱정한 적도 있었다. 자다가 눈을 떴는데 너무 깜깜한 것 같으면 떨리는 마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불을 켜고 시력을 테스트했었다. 

그런 것들은 모두 기우였다.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 눈수술 부작용이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는 쓸데없는 걱정들이었다.


어젯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불면증이 얼마나 집요한지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주저 없이 졸피뎀을 삼켰다. 몽유병이나 그 반대의 증상, 깼는데도 꿈꾸는 것 같은 착각 같은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런 건 잠자지 못하는 괴로움에 비하면 충분히 감수할 만한 것들이니까.

그래서였을까? 이틀 전 내린 황사비로 더러워야 할 내 차가 깨끗하게 세차 돼 있는 것을 보고도 무심코 넘겼다. 그럴 수 있지. 그러나 출근길 올림픽대로를 운전하면서 생각했다. 

‘언제 세차했었지? 밤에 소나기가 내렸나?’


오전 9시 40분, 화장실에 갔다. 볼일을 보면서 대형 파노라마 유리창으로 북한산을 내다 볼 수 있어 회사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누군가 가져다 둔 예쁜 화분과 수생식물들 사이로 파란 하늘이 어른거릴 때면 그 평안한 풍경에 볼일이 끝나고도 몇 초는 더 머무르는 곳이었다. 

해가 잘 들지 않는 화장실인데도 연둣빛 잎사귀를 무성하게 피워낸 테이블야자가 대견해 물속에 잠긴 그 뿌리를 들여다볼 때였다. 투명한 글라스 안, 노랗고 하얀 뿌리 사이로 파란색 지느러미 같은 것이 팔랑거렸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빨간 머리에 파란 지느러미를 가진 제법 큰 금붕어였다. 누가 금붕어를 여기에 키우지?

사무실에 돌아와 옆자리의 후배 장우일 기자에게 물었다. 

“화장실에 금붕어 봤어? 누가 키우는지 알아?”

장우일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금붕어요? 이 건물로 올 때부터 있었잖아요. 선배 같은 사람이 그걸 이제 보다니.. 하기야 버리는 시간 싫어하니까 볼일만 보고 튀어나오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큭.”

“야, 농담하지 말고. 정말 금붕어가 이사 올 때부터 있었다구?”

“농담 아닌데. 보도국에 금붕어 모르는 사람 없을 걸요?”


짧은 대화를 끝내고 나는 다시 화장실에 가서 금붕어에게 물었다.

“야, 언제부터 있었던 거니? 너 밥은 먹고 사니? 유리병이 너무 좁지는 않아?”


오후 2시 반, 보도국 편집회의를 끝내고 나온 경제부장이 물었다.

“김차장, 어제 취재 나갔던 것 완제품 만들었지? 그거 오늘 내기로 했어. 기사랑 수퍼 잊지 말고 넘겨. 알아서 잘하겠지만.”

머리가 멍해졌다.

“네? 그 아이템은 어제 부장님이 필요 없다고 해서 킬했는데요?”

“내가 언제? 어제는 아이템 많아서 오늘 낸다고 미리 만들어 놓으라고 했잖아?”

“아니, 그게 아닌데...”

경제부장은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봤고 난 황당함에 억울함이 더해져 어떻게 할지 몰랐다. 이때 장우일이 끼어들었다.

“선배, 어제 그 기사 만들어 놓고 갔잖아요. 그거 한다고 저녁약속에도 늦게 오시고는 왜 그래요?”

장우일의 말에 나 대신 경제부장이 안도했다. 

“김차장, 무슨 농담을 그렇게 무섭게 해? 가뜩이나 정신없는데. 만들어놨다니 됐어.”

경제부장이 잰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간 뒤 장우일에게 물었다.

“장우일, 내가 그걸 어제 만들었다고? 니가 봤어?”

“보진 않았지만, 편집실 가보면 되잖아요. 선배가 분명히 다 만들었다고 했는데.”

더 실랑이하고 싶지 않아서 편집실에 가서 기사 완제품 목록을 뒤졌다. 

‘전격 금리인상, 주식시장은 대폭락?’   

정말 있었다. 취재 나간 기억이 없는데 증권사 애널리스트와 한국은행 관계자의 인터뷰가 포함된 리포트 기사가 완성돼 있었다. 당장 오늘 방송해야 할 아이템이 깔끔하게 제작돼 있다는 점에서 안도했지만 내 기억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졸피뎀 부작용이 확실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일찍 퇴근했다. 그리고 수면제 없이 잠들었다. 


이튿날. 목요일

머리가 개운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런 기분이 든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평소보다 출근이 빨랐고 회사에 도착하니 커피 한잔 마시고 올라갈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 

‘스페셜커피하우스’그곳에 가면 에디오피아 예가체프에서 직접 공수한 아리챠 원두를 맛볼 수 있었다. 일반 커피전문점보다 천원이 비싸지만, 그 작은 사치가 꼭 필요한 순간이었다. 순수한 카페인으로 대뇌피질을 각성 시키면 어제와 같은 기억 왜곡은 없어질 것이었다. 

그런데 커피하우스가 문을 닫았다. 마지막 방문했을 때가 3일 전인데 그 사이에 폐점한 것이다. 문 앞에는 폐점을 알리는 안내문이 적혀있었다. 눈에 익숙한 커피집 사장의 손글씨였다. 개인사정으로 영업을 종료하겠다는 것인데 날짜가 이상했다. 

안내문 대로라면 이곳은 일주일 전에 영업을 종료했다. 자세히 보니 손글씨가 적힌 백지가 누렇게 변색돼 있었다. 그렇다면 3일 전에 여기 왔던 나의 기억은 무엇일까? 

산뜻했던 기분은 깨지고 어제보다 더 무거운 머리를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런데 남의 책상에 앉은 것같이 낯설었다. 가만 보니, 내가 커피를 따라 마시던 머그컵도 없고 연필꽂이도 없었다. 서랍을 열었더니 모르는 물건만 가득했다. 

장우일 기자가 나타났다.

“선배 내 자리에서 뭐해요? 뭐 필요한 것 있어요?”

내 책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아니.. 그게.. 내 책상은 어딨어? 요즘도 일 못한다고 책상 빼고 그러냐?”

우선은 농담으로 던졌다. 내 기억을 믿지 못해서였다. 

“그 반대겠죠. 이거 원 청와대 출입기자 못하는 놈은 서러워서 살겠나? 잘난 체 그만 하시고 정치부로 가시죠. 그런데 청와대 춘추관으로 출근하는 것 아니었어요? 오늘 내근이에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침착해야 했다. 장우일의 말이 사실이면 난 하루아침에 경제부가 아니라 정치부로 바뀌었고, 출입처가 청와대라는 것이었다. 지난 인사에서 청와대 출입기자를 지원한 적은 있었지만 보도국장이 반대해 경제부로 발령 받지 않았나? 무엇이 사실이지?

“아.. 그래.. 미안..”

그때 전화벨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청와대 기자실에 출입하고 있는 후배 민성준 기자였다. 

“선배 어디십니까?”

“회사인데. 왜?”

“아니 거길 왜? 지금 여기 난리 났습니다. 외교안보수석이 긴급브리핑한다는데 북한이 핵실험을 한 것 같습니다. 곧 생방 물릴 것 같은데 중계차는 제가 불렀습니다. 언제까지 오실 수 있습니까?”

말문이 막혔다. 내가 청와대 출입인 것도 모자라서 난데없이 뉴스속보 생방송을 해야 한다니.. 

“미안한데. 내가 급한 일 때문에 회사에 들어와서. 1보만 니가 커버해 줄래? 곧 들어갈게.”

청와대 2진 기자만 3년째인 민성준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기사도 빨리 쓰고 방송도 잘하니 그가 도와준다면 뉴스가 펑크날 일이 없었다. 

뭐가 어디서부터 얼마나 잘못됐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청와대부터 가야했다. 내비게이션으로 최근 이동경로를 살펴보니 청와대 춘추관 주차장이 바로 검색됐다. 기계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난 어제도 청와대로 출근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그럼 만들지도 않았던 ‘주식시장 폭락’ 기사를 방송했던 어제는 통째로 꿈이란 말인가? 

보안이 철저한 청와대 출입도 어렵지 않았다. 내 차는 주차시스템에 이미 등록돼 있었고 출입문을 지키는 청와대 직원은 내 얼굴만 보고 문을 열어줬다. 

유능한 후배 민성준은 내가 방송할 기사의 초안까지 작성해 놓았고 난 정오뉴스에 ‘북한 핵실험’ 기사를 무리없이 방송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다.’ 


3일째. 금요일.

아침에 눈을 뜨고, 눈이 잘 보이는지 보다 뭐가 보이는지를 먼저 생각했다. 일단 집은 그대로, 차도 그대로였다. 청와대로 가야 할지 경제부로 가야 할지 몰라서 민성준에게 전화했다.

“그럼요. 선배. 오늘부터 새로 바뀐 출입증도 나왔으니 입구에서 받아서 들어오시면 됩니다.”

역시 경제부가 아니라 청와대 출입이 현실이었다. 그전까지 기억이 전부 왜곡됐던 것이다. 

청와대 춘추관 앞에는 데일리브라운이라는 카페가 있었다. 매일 갈색 빵을 구워낼 것이라는 추측과 달리 매일 신선한 원두를 볶아 커피를 내놓는 가게였다. 다른 것은 전부 낯설어도 데일리브라운의 의자와 테이블만은 꽤 오래 앉았었던 것처럼 몸에 맞았다. 

청와대 담장 넘어 머리를 내밀고 있는 소나무 두 그루와 그 위의 청록색 지붕, 더 위의 파란 하늘, 게다가 하얗게 부풀어 오른 카푸치노의 우유거품 향을 맡으며 잠시 행복했다. 

‘그래 기억이 어떻든 무슨 상관이야. 지금이 중요하지.’

방송기자가 된 뒤 내내 원했던 청와대 출입기자,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던 인생의 두 가지 꿈 중 하나를 이룬 것이었다. 그 과정은 기억나지 않지만 중요한 건 현실 아닌가?

커피잔 옆으로 가지런히 놓여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와이프 지연이었다. 그녀가 일어나기 전에 출근해서, 잠들고 나면 퇴근하니 얼굴 못 본지가 일주일은 된 것 같았다. 전화라도 하지 않으면 아내라는 것도 잊고 지낼 지경이다. 그런데 휴대폰에 그녀의 이름이 뜨자 심장이 죄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좋은 일로 전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준희 체험학습은 어떻게 할 거야? 그건 자기가 책임지기로 했잖아. 선생님이 오늘까지는 알려달라고 했는데, 또 우리만 연기해 달라고 해?”

예상대로 목소리에 신경질이 잔뜩 묻어있다. 그녀의 얼굴표정은 보지 않아도 훤히 떠올랐다. 내 머리는 언제나처럼 어떻게 하면 이 곤경을 벗어날 수 있을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어떤 핑계를 대지? 그러다 문득 이곳은 청와대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청와대 견학 어때? 춘추관장한테 부탁해 볼게.”

청와대 견학 체험학습은 대성공이었다. 춘추관장은 청와대 관람 예약자 명단에 빈자리가 두 개 있다며 준희의 친구까지 청와대 견학을 할 수 있게 도와줬다. 

“자기 정치부 가서 좋은 점도 하나 있네. 내일 들어 올 거지?”

또 자정 너머서 들어올 거면 깨우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래도 와이프의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내일은 주말이니 정말 그녀를 보게 될 것이다.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데 뭔가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내 전화기가 갤럭시가 아니라 아이폰이었던 것이다. 

‘이게 왜 아이폰이지?’

2년 전, 내 전화기는 잠시 아이폰이었다. 

이하늘, 그녀의 생일선물로 아이폰을 사주고 내 전화기도 아이폰으로 바꿨다. 그녀는 20대, 난 30대. 그녀는 학생, 나는 직장인. 그녀는 미혼, 나는 기혼. 뭐하나 같은 게 없었던 우리 사이에 공통점 하나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겨우 아이폰 하나만큼의 공통점을 가진 우리 관계는 애매했던 만큼 오래가지 않았다. 밤새 술은 같이 마셔도 1박2일 여행은 갈 수 없었고, 악수는 해도 키스는 할 수 없었다. 뭐든 얘기할 수 있었지만 끝내 고백은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고, 끌리는 감정을 표현할 언어가 없어 헤어지는 것을 택했다.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기약 없이 미루는 방식으로 헤어졌다. 계절이 두 번 바뀔 때까지 그녀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첫눈이 내리던 날 그녀의 전화번호를 지우고 휴대폰을 아이폰에서 갤럭시로 다시 바꿨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지우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난 그녀의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했다. 겨우 숫자 8자리를.  

‘언제부터 이게 다시 아이폰이었지? 어제도? 그제도?’

기억이 꼬여버린 첫날부터였는지 아니면 오늘 아침부터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휴대폰 케이스 색깔이 비슷해서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고 휴대폰을 아이폰으로 또 바꾸고는 잊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요 며칠 내 기억은 엉망진창이었으니까.


지문으로 아이폰을 열고 주소록에서 그녀의 이름, 이하늘을 검색했다. 지웠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전화번호가 살아있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모세혈관이 팽창돼 얼굴이 따뜻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SNS 상태창을 열었다. 그녀의 프사에는 고흐의 ‘꽃피는 아몬드나무’ 그림이 걸려 있었고 ‘기다림’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있었다. 누굴 기다리는 것일까? 혹시 나?


정신병원에서 치료받던 빈센트 고흐는 동생 테오가 아들을 낳았다는 편지를 받은 뒤 자신도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하얀색 꽃잎이 만발한 아몬드나무를 그렸다. 

하늘에게 고흐의 ‘아몬드나무’ 복제화를 선물했던 기억과 함께 그때의 설레임이 순식간에 소환됐다. 이러면 안된다는 인내심은 무용지물에 불과했고 이성은 마비됐다. SNS에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대화창을 한참 노려보다가 나도 세 글자를 적었다.

/만날까?/

메시지를 보냄과 동시에 폰을 외면했다. 그녀가 메시지를 읽는지 확인하기 싫었다. 그냥 이대로 잊겠다고 다짐했다. 내일이면 내 현실이 또 바뀌길 기대하면서. 


4일째. 토요일.

일어나보니 오전 9시가 넘어 있었다. 따가울 정도로 밝은 아침 햇살이 아니었다면 더 잤을 수도 있었다. 문득 휴일근무인데 늦잠 잔 건 아닌지 걱정돼 후배 민성준에게 전화했다. 그는 이미 청와대 기자실에 나가 있었다.

“선배는 내일 근무인데요? 오늘 중요한 약속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중요한 약속? 기억나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일정을 확인하려는데, 이하늘, 그녀의 SNS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발신 시각은 새벽 1시, 착각이겠지만 그녀의 고민이 찌릿하게 전해져왔다. 

/내일, 이태원.. 오후 3시에 볼 수 있을까요?/

서둘러 답장하려는데 집안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와이프 지연과 준희가 보이지 않았다. 난 늦잠 자게 내버려 두고 둘만 나간 것이 분명했다. 

/응/

짧고 분명한 답장을 보내고 나니 오히려 모호해졌다. 그녀가 말한‘내일’은 오늘일까? 내일일까? 새벽 1시의 내일이면 일요일이지만, 잠들기 전 내일이면 오늘인데.. 

이런 고민은 휴대폰 캘린더에 적힌 와이프의 이름을 보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전 11시, 유지연’

토요일, 오전 11시에 와이프와 약속이라니.. 그것도 아내도 준희 엄마도 아닌 ‘유지연’과.

바로 지연에게 전화했다. 

=왜?

그녀는 받자마자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아니, 오늘 11시에 무슨 약속이...”

=안돼! 오늘은 무조건 만나. 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 거 자기도 알잖아! 아무리 중요한 일이 생겼어도 오늘은 안돼. 11시야. 올 때까지 기다릴 거니까 꼭 와! 진짜 안 오면.. 하여튼 꼭 와!

전화가 끊겼다. 안 오면 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집안을 둘러보니 아내의 물건도 준희의 물건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야, 임마. 너 뭘 어떻게 한 거야?’

사실을 추정해 보니 아내와 난 별거 중인 것이었다. 내가 이 정도였나? 내 기억에 알콩달콩 살지는 않아도 그리 나쁜 사이는 아니었다. 문제는, 내 기억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11시라고만 했지 어디서 인지는 듣지 못했다. 캘린더에 장소가 없다는 것은 자주 가는 곳, 최소한 내가 아는 장소라는 것이다. 

‘어디일까? 지연이와 좋지 않은 일로 봐야 할 때.’ 

그녀와 자주 갔던 곳, 편하게 사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곳, 11시니까 식사는 아니고 카페, 그리고 처음과 끝에 어울리는 곳. 

알았다!


10분 일찍 갔는데도 지연은 먼저 와 있었다. 그만큼 화가 나 있다는 것이다. 별거하고 있다면 갈 데까지 갔다는 것인데 무엇이 그녀를 분노하게 했을까? 난 기억나지 않는데, 기억하지 못하면 죄가 사라지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

“일찍 왔네.”

나의 인사에 당연히 대답도 없고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커피는 먼저 시켰지만 한모금도 마신 것 같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어도 지연이는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준희는 내가 키워.”

단호한 목소리, 이 짧은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 지연이는 수많은 단어를 곱씹었을 것이다. 굳게 다문 입술, 평상시 보다 짙은 눈화장, 미용실에서 세팅한 펌머리. 대기업 면접이라도 갈 것 같은 치장이지만 그것이 그녀의 가면이며 갑옷이다. 난 무슨 짓을 저질렀던 것일까?

“잠깐만, 물어볼 게 있는데.”

“아니, 내가 키우는 게 나아. 준희 나이에는 아빠보다 엄마가 더 필요해. 내 조건은 이거 하나야. 집이든 예금이든 자기가 하자는 대로 할게. 어차피 자기는 시간도 없잖아!”

“아니, 내 말 좀.”

“듣기 싫어. 날 설득할 생각하지마.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어. 정말 나 죽는 거 보고 싶어?”

어제만 해도 준희의 체험학습 문제를 해결했다고 좋아하지 않았나? 그것도 꿈이었나? 도무지 어떤 게 현실이고 망상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미칠 것 같다.

“그게 아니고, 요즘 내가 말이야..”

“싫어. 결정했다고. 난!”

나도 더는 참기 힘들었다.

“내 말 좀 들어! 준희는 니 맘대로 하라고. 대신..”

‘맘대로 하라’는 부분에서 지연의 분노가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

“대신 뭐?”

목소리가 떨린다. 내가 어떤 요구를 할지 몰라 긴장하는 것이다. 도무지 난, 도무지 난, 난 뭐지? 

“한번만 더 생각해줘.”

“뭘 생각해?”

“헤어지는 거.”


내가 먼저 일어나서 카페를 나왔다. 시계를 보니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겨우 15분이라니.. 시간은 확실히 상대적이다.

이때 휴대폰 진동음이 느껴져 주머니에서 꺼냈다. 하늘의 SNS메시지가 도착했다. 정말 부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아시겠지만‘내일’은 일요일이에요./

내일은 일요일이다.


5일째. 일요일.

8시에 청와대 기자실로 출근했다. 일요일이라서 기자실에는 방송기자 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점심쯤 되면 월요일 조간을 위해 신문기자들이 나올 것이고 오후에는 꽤 북적거릴 것이다.

오전 편집회의가 끝나고 회사에 부장 대신 출근한 선임데스크가 ‘별거 없다’는 희소식을 전해왔다. 특별한 일정이 생기지 않는 한 조용히 기자실만 지키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약속은 오후 3시, 애매한 시간이었다. 좀 빨리 퇴근하기도, 나갔다가 돌아오기도 어정쩡한 오후 3시, 왜 하필... 

청와대 춘추관 문만 열고 나가면 바로 앞에 있는 데일리브라운 커피전문점에 앉아서 노트북을 열고 커피를 마셨다. 갓구운 원두에서 추출한 에스프레소 커피향은 변함없었다. 완전히 뒤틀린 내 기억과는 사뭇 달랐다. 뭐가 사실이고, 뭐가 왜곡일까? 

가장 궁금한 건 왜 이혼 문턱까지 와 있냐는 것이다. 도저히 모르겠다.

‘더는 날 사랑하지 않아 헤어지는 것이라면.. 그런 것이라면.. 그랬으면 좋겠다.’


오후 2시30분, 과감히 기자실을 비우고 이태원으로 향했다. 춘추관장에게 물어보니 오후에도 청와대에는 ‘별일 없을 것 같다’는 답변을 들었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모르겠다. 전부 엉망이 된 마당에 자포자기 심정이 되었다.  

이태원 길거리 주차장이 만차라 아무 빌딩이나 들어가서 바가지 요금으로 주차를 하고 나왔더니 오후의 따가운 햇빛이 눈을 부시게 했다. 아직 여름이 아닌데도 여름처럼 더운 날씨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블레이저를 벗고 와이셔츠를 두번 접어 팔뚝까지 걷어붙인 다음에야 약속장소로 향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하늘은,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더위에 쪄 죽어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커피 매니아였다. 와인은 샴페인부터 시작하고, 위스키는 피트향이 강한 것을 좋아했으며 맥주를 꼭 마셔야 한다면 라거보다 에일을 선호했다. 아이폰 말고도 공통점이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랬던 그녀가 아이스커피를 가져다 놓고 마시지는 않는 채 어딘지 모를 곳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하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내게 눈을 돌린 그녀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나는 너 없어도 충분히 잘 살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 앞에 앉는 대신 조금은 냉정하게 말했다.

“어차피 찬 거 마실 거면 샴페인 마시러 가자. 날씨가 덥네.”


빨간 차양이 쳐진 루프탑 카페테리아, 서울타워가 아스라이 보이고 의자와 테이블은 거칠었다. 오후 3시부터 술 손님이 올 것을 예상 못한 종업원이 서둘러 세팅한 테이블 커버와 체크무늬 냅킨이 얼음통에 담긴 샴페인과 겨우 격식을 맞췄다.

첫잔을 따르고 가볍게 잔을 부딪칠 때까지 누구도 선뜻 먼저 말하지 못했다. 샴페인의 기포가 입안에서 톡톡 터지며 목젖을 따끔하게 자극하고 나서야 말문이 트였다. 

“어떻게 지냈어?”

내가 말할 때까지 샴페인 잔을 들고 있던 그녀는 한모금을 더 넘기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동안 미뤄뒀던 숙제를 했어요.”

뭔가 미진하다. 대학원까지 졸업한 그녀가 할 숙제라는 게 뭘까? 인생 숙제?

“숙제라면 당장 떠오르는 건, 결혼밖에 없는데. 결혼했어?”

반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마음속 어느 부분이 ‘쿵’하고 무너졌다. 

“와! 미남이야? 돈 많이 벌어? 성격 좋아?”

오버다. 게다가 내 질문에는 모두 ‘나보다’가 빠져있었다. 

“아니요.”

안심했다. 

“그럼 왜?”

“글쎄요. 왜일까요? 저도 의문이에요.”

“결혼생활이 만족스럽지 않구나?”

“만족이요? 정반대에요. 저번 주에는 글쎄... ”

오케이. 이만하면 술에 취할 필요충분조건은 갖춰졌다. 연거푸 잔을 비운 덕에 샴페인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고 테이블 위에는 화이트와인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종업원이 친절해졌다.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애정’이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직은 취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흘깃 봤다. 오후 5시,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는 없었다.


술 마시는 속도는 더 빨라져 화이트와인도 끝났다. 우리를 주시하던 종업원이 다시 다가왔다. 

“필요하신 것 있습니까?”

“잠시만.”

난 휴대폰 시계를 보며 카운트다운했다. 

“5, 4, 3, 2, 1. 땡. 공식적으로 휴일근무 종료. 어떻게? 와인을 더해? 아니면 본격적으로 위스키 마시러 갈까?”

“와인이요.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 해요.”

오늘은? 내일이 또 있다는 의미였을까? 일회성 재회가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나?

결국 마지막에 시킨 레드와인은 다 마시지 못했다. 다 마시면 작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기자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청와대 출입이면 좋은 거죠?”

“나? 엉망이야.”

솔직한 대답이었지만 그녀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저보다 더요?”

“내가 더 바닥일 껄?”

차마 이혼을 앞두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말했을지 모른다. 술기운을 빌려 제대로 들이댔을 수도. 이제 나도 솔로이니 사귀어 보자고. 

“그러게 결혼하지 말라 했잖아.”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랬어요? 언제요? 그렇게 중요한 말은 정확하게 말했어야죠.”

하늘은 정말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은 인생에 지쳐 보였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너. 너는 현실이니? 아니면 왜곡된 내 기억이니?

와인을 그렇게 부어 마시고도 그날 밤은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6일째. 월요일.

점심시간을 빌어 정신병원을 찾아갔다. 다른 병원이라면 의학전문기자의 소개를 받고 가겠지만 ‘정신병원’ 아닌가? 오전 내내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찾아간 곳은 좀 애매했다. 눈에 익은 것 같은데 처음 온 곳이었다. 

“처음이신가요?”

“네? 당연히 처음입니다.”

나보다 열 살은 더 먹어 보이는 남자 의사. 남의 정신을 감정하는 전문가답게 권위적인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최근 겪었던 기억의 손실과 왜곡에 대해 꽤 자세히 설명했는데 그는 별로 귀 기울이지 않았다. 

“건망증이나 해리성 기억상실로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MRI 같은 걸 찍어 봐야 하나요?”

“그럴 것까지는 없구요. 인간의 기억이란 게 원래 믿을 게 못 됩니다.”

“무슨 뜻인지...?”

“자기 딴에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믿어도 1년만 지나면 기억의 50%는 편집되고 왜곡됩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아세요?”

“허언증 아닌가요?”

“공상이나 허구를 진짜 사실로 믿는다는 측면에서 비슷하지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의사는 한층 여유 있는 모습으로 회전의자에 몸을 기대며 계속 말했다. 

“허언증은 타인의 관심을 받는 게 목적이지만, 리플리 증후군은 자기만족이 우선입니다.”

“제가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말씀입니까?”

“글쎄요. 처음에 기억이 이상하다고 느낀 게 금붕어 때문이라고 했죠?”

“네.”

“그 금붕어가 아직도 있습니까?”

“그건 회사에 들어가 보지 않아 모르겠는데요.”

“경제부였는데 하루아침에 청와대 출입기자로 바뀌었고, 갤럭시폰이 아이폰으로 바뀌었다구요? 지웠던 전화번호가 되살아났고..”

“네.”

의사는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켜고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더니 다시 말했다.

“흥미롭네요.” 

“뭐가요?”

기분이 나빠졌다. 용기를 내서 정신병원까지 찾아왔더니 의사는 나를 실험용 더미 취급을 하고 있다.

“인터넷에 기자님을 찾아보니 청와대 기자가 맞고, 전화기도 그거 아이폰 맞죠? 거짓말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리플리 증후군이나 허언증은 아니죠. 기억손실도 아닌 게 기억이 체계적이고 빠지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뭔데요? 아무 문제 없다는 겁니까?”

내 목소리에도 신경질이 묻어났다. 의도한 것이었다. 

“아무 문제 없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흥미롭다고 했지. 혹시 ‘세계 5분 전 가설’이라고 들어봤습니까?”

“모릅니다.”

의사는 내 신경을 긁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워낙 마이너한 가설이니까 모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 버트런드 러셀이 제기한 가설인데요. ‘이 세계는 사실 5분 전에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5분 전에 세계가 만들어졌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은 안 되는데,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과거란 인간의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니까요. 전능한 우주인이 우리 모두의 기억을 조작해 마치 오랜 세월 살아왔다는 기억을 심었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가 실은 5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우리는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의도는 뭐지?

“그래서요?”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조금씩 바뀌었다고 했지요? 없던 금붕어가 새로 생기는 것처럼.”

“네.”

“이상한 소리 같지만, 김기자님의 세상은 실제 매일 다른 세상일지도 모릅니다. 아침마다 새로운 세상이 생기는 거죠. 세계 5분 전 가설처럼.”

“네?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나는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흥분하지 마세요. 그럴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럼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말해주지 않는다면 김기자님의 기억이 맞는지 틀렸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겠지요? 비디오로 녹화된 것도 없다는 가정에서요.”

“그렇겠죠.”

“그런데 1분 전도 과거고 1초 전도 과거입니다. 실제 과거는 현재와 꽤 밀접하게 붙어 있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를 완전히 분리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뻔한 소리,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 그러면 봅시다. 김기자님은 기억이 잘못됐는지, 실제 현실이 바뀌었는지 구분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현실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억만 의심하는데 하루아침에 현실이 바뀌지 않았다고 100%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의사는 교묘한 말로 말장난을 하며 날 시험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그것은 내 정신상태를 감정하려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선생님도 알지 않나요?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나도 처음에는 잊고 싶은 과거의 충격 때문에 생긴 해리성 기억상실을 의심했습니다. 이를테면 부인과 이혼하게 된 그 정황 자체를 잊음으로써 현실을 도피하는 겁니다. 그런데 금붕어나, 아이폰, 경제부에서 정치부로 이동, 이런 것들은 그것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아, 그 스페셜티 커피전문점도요. 거기서 커피 한잔 마셔봤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나도 커피 매니아이거든요.”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겁니까?”

“나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24시간 김기자님을 따라다니며 내 눈으로 본 게 아니니까요. 다만 치료의 목적이 환자의 정신건강이라면, 여기 적혀있다시피, 굳이 자기 기억만 의심하면서 스스로 문제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이 바뀔 수도 있는 거죠. 뭐 어떻습니까? 자기 탓하기보다 남 탓하고 사는 게 요즘 트렌드 같은데.” 

상담은 끝났다. 의사의 말을 다 믿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어느 정도 정신적 위안을 얻은 것도 사실이었다. 간단히 고개를 꾸벅하고 진료실을 나가는데 의사가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정말 여기 처음 온 것 맞습니까?”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아닙니다. 가보십시오.”


7일째. 화요일.

기자실을 나서는데 유리문 중앙으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라틴어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기억을 뒤져 어제도 있었는지 생각하려 했지만 바로 그만뒀다. 

‘현재를 잡아라’

라틴어 격언조차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그렇다고 미래만 믿지도 말고, 지금을 잡으라 하지 않았나? 결국 있는 건 현재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진실이다. 내 기억이 혹은 내 과거가 다소 일그러져있다고 해서 그게 뭐 대수일까? 지금이 중요하다. 


“하쿠나 마타타.”

“뭐?”

“전 카르페 디엠 보다 하쿠나 마타타가 더 좋다구요.”

하늘은 글라스 안의 얼음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인데?”

“다 괜찮다.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인데, 모르세요? 라이온킹에 나왔는데.”

나는 어제 정신병원에서 의사에게 들었던 말들을 곱씹느라 그녀에게 집중하지 못했다.

“하쿠나 마타타라.. 좋네. 그런데 그렇게 괜찮다고 말한다고 정말 괜찮은 건 아니잖아.”

“정말 조금도 변하지 않으셨네요.”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먼저 술자리를 청했으면서도 오늘은 많이 마시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것도 있어야지.”

실은 너무 변해서 문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현실은 멋대로 바뀌고 있을지 몰랐다. 

“오늘은 늦어도 돼?”

“자유에요. 출장 갔거든요.”

“니 남편?”

당연한 걸 물었는데 하늘은 답하지 않았다. ‘남편’이라는 말을 쓰지도 않겠지만 듣지도 않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걱정 있으세요?”

“걱정이라기보다 요즘 나를 믿을 수가 없어서.”

“믿을 수 없다는 게.. 어떤 면에서.. 혹시 제가 알면 안 되는 건가요?”

차마 정신병원에 갔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만약에 말이야. 니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가 실제와 다르다면 어떡할래? 예를 들면 너 결혼했잖아. 그건 니 기억일뿐이고 실제는 결혼하지 않은 거지.”

“기억조작 같은 거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지금이라도 난 결혼 안 했다. 그건 꿈이야! 이러면.. 와!”

“그게 한번이 아니고 계속 조금씩 바뀐다면? 늘 가던 커피집이 없어지고, 자고 일어났더니 부서가 바뀌고. 누굴 만난 것 같은데 그 사람은 날 만난 적 없다고 하고. 내 기억에는 있는데 실제 그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반대로 기억에는 전혀 없는 일이 지금은 발생해 있는 거지.”

“기자님이 그렇다는 건 아니죠?”

날 바라보는 하늘의 눈에 의아함이 맺혔다.

“그렇다면 미친 걸까?”

하늘은 대답하지 못했다. 미쳤다, 안 미쳤다, 어떤 대답을 했어도 난 만족하지 못할 테고,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쿠나 마타타. 괜찮아요. 문제없어요. 지금은 멀쩡하잖아요.”

잔을 들어 건배하자는 포즈를 취했다. 난 조금 망설이다가 내 앞의 잔을 들어 가볍게 건배했다. ‘챙’하는 유리 부딪치는 소리에 정신이 조금 들었다. 

“그런데 내일 너한테 연락했더니, 오늘 만난 적 없다고 하면 어떡하지? 우리가 나눈 대화, 날 보는 네 눈빛, 이곳의 분위기, 전부 거짓이라면. 내 망상이라면?”

하늘은 딱하게 쳐다봤다. 어쩌면 그녀가 날 바라본 눈빛 중 가장 따스한 색깔이었다. 

“그럴 일 없어요. 지금 이 순간은 우주가 바뀌어도 사실이니까요. 혹시 내일 이런 일 없었다고 말하더라도 기자님이 기억한다면 지금은 있는 거에요. 지금 이 순간, 바로 지금을 잡아요. 그게 카르페 디엠이잖아요.” 

역시 만족스럽지 않았다.

“만약에 이 현실이 수 많은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한 것이라면, 선택하지 않은 가능성 중에서 너와 함께하는 것도 있을까?”

쉽지 않은 질문에 하늘은 또렷이 쳐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네.”


자정 전에 집에 돌아와 지연이에게 전화했다. 오늘이 끝나기 전에 내가 결정한 것을 말하고 싶었다. 기억이든 현실이든 내일이면 또 바뀔지 몰랐으니까. 

=당분간 전화 안 하기로 했잖아. 그리고 시간이 너무 늦었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 그러나 지연은 화내지 않았다. 

“미안, 오늘 꼭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뭔지 모르지만 할 거면 빨리해!

“니 뜻대로 해.”

=뭘?

“이혼도, 준희도 전부 다 니가 하자는 대로 할게.”

원하는 말을 들었을 텐데도 지연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로 정적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내일 다시 통화해. 나 잘래.

“잠깐만, 왜 그래? 뭐가 잘못됐어?”

=뭐가 잘못 됐냐구? 전부 다 잘못됐어. 

술 기운도 남아있었고 짜증도 났다. 참을 만큼 참았다. 기억 못하는 게 죄라면 죄지만, 내가 뭘 어떻게 했다고 나에게 이럴까?

“그래, 한번 들어나 보자. 내가 뭘 잘못했는데?”

=또 기억 안 나는 거지?

알고 있었다. 지연이는 내 증상을 알고 있었다.

“요즘 내 기억이 좀 이상하다는 건 아는데, 어지간한 건 다 기억하고 있어. 그러니까 내 기억 탓만 하지말고 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하라고. 어차피 이혼하는 마당에 못 할 말이 뭐 있어? 나도 궁금해서 그래.”

지연은 대답 대신 긴 한숨을 쉬었다. 

=이제 나도 지친다. 자기는 잊으면 그만이지만, 계속 살아가야 하는 나는.. 나는 어떡하라고? 나만 나쁜 년 만들고.. 그런데 이거 하나는 알아야 해. 헤어지자고 한 건 자기야. 

“내가 헤어지자고 했다고? 무슨 말이야 그게?”

=자기가 헤어지자고 했어. 난 같이 치료해보자고 했는데 이혼을 요구한 건 당신이라고. 제발 정신 좀 차려.

거짓말이 아니다. 지연이는 없는 말을 지어내는 사람이 아니고 나도 마찬가지다. 기억이 사라졌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진 않는다. 기억상실 증세가 심각해지자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을 수 있다. 아니다. 확실히 내가 했을 것이다.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면 여기는 정말 다른 세상이거나. 5분 전에 이 세계가 생성됐다.

“그랬구나. 내가 헤어지자고 했구나. 미안해. 화내서 미안해. 이제 전화 안 할게.”

=자기도 좀 쉬어.

“그런데 준희는 잘 있지?”

지연은 휴대폰이 끊긴 듯 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지연아. 준희 잘 있냐고? 그건 말해 줄 수 있잖아.”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준희는 이제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준희가 없다니..?”

=준희는 죽었어. 아주 오래 전에.

“뭐? 언제?”

=전화 끊을게. 이제 전화하지마. 다시는 하지마. 해도 받지 않을 거야. 잘있어.

전화가 끊겼다. 다시 지연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무너졌다.  

준희가 없다니, 준희가 죽었다니, 절대 그럴 리 없다. 아무리 정신에 문제가 있다 해도 어떻게 그런 일을 잊나? 

몇 번을 생각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내 기억은 멀쩡하다. 난 미치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 난, 행복하지 않아도 살아가고 있었고, 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준희를 사랑했다. 

그래, 날 위해 살 수 없다면 준희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때문에 준희와 지연이를 같이 떠나보낸 것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나?

난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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