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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Aug 26. 2016

요리하는 남자

생존의 기술? 섹스의 기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몇 편 읽다보면 인상에 깊게 남게 되는 것 중 하나가 파스타를 삶는 남자일 것이다. 지금이야 파스타 정도는 간편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재료가 인스턴트화 되었지만 이탈리안 레스토랑도 흔치 않았던 90년대 후반에 파스타를 요리하는 남자의 이미지라는 건 이국적이고 희귀한 느낌이었다. 하루키 소설을 장악하고 있는 섹슈얼한 분위기 덕분에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매력은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이미 출근한 오전, 느지막하게 일어난 남자가 파스타를 삶는 모습이란 찬밥만 남은 밥솥, 식탁 위의 마땅치 않은 찬거리를 보고 포기한 듯 냄비에 물을 담고 라면을 끓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일 수밖에 없다.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제안보다 ‘내가 봉골레 파스타를 만들어줄게요.’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 더 유혹적으로 들린다. 거부감 없이 집으로 초대해 섹스를 유도하는 것이 오늘의 요리가 가진 목적이라면 조금 더 정성이 더해진 ‘요리’일 때 낚시에도 입질이 더 잘 오지 않겠는가. 물론 빠뜨릴 수 없이 중요한 것은 요리의 맛이겠지만 그 순간 여자들이 끌리게 되는 것은 맛에 대한 기대보다는 나를 위해 요리를 하는 남자의 태도에 있다.


‘독자의 마음을 진정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뛰어난 문장도 아니요 재미있는 줄거리도 아니요 자연스레 배어나오는 분위기’라고 말했던 하루키의 말처럼 결국 여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특출하게 뛰어난 자기만의 레시피나 타고난 손맛보다는 요리하는 남자라는 분위기. 남자의 요리는 일상이 아니라 환상을 파는 도구가 된다. 그렇기에 섹스를 위한 수단으로 요리를 이용할 줄 아는 남자는 영리한 셈이다.


식욕과 색욕, 둘 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와 관련된 일이다 보니 서로가 비교되고 비유된다. 잘 요리된 음식을 탐하는 방법은 섹스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입으로 집어넣어 삼키는 단순한 매커니즘으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공감각적으로 대상에 접근한다. 미각적 표현을 넘어선 음식의 시식평을 보고 읽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섹스를 연상할 수 있는 묘사가 가득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섹스 역시 상대를 먹음직스러운 음식에 비유하고 섹스의 과정을 어떻게 맛 볼 것인가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나가며 흥분을 고조시킨다. 그렇기에 음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인 요리에도 섹시한 구석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요리하는 여자인 ‘나’는 과연 섹스어필할까? 내가 남자를 위해 요리를 할 때는 ‘전날의 섹스가 만족스러우면’이라는 단서가 붙었다. 어머니가 차려주셨던 어째서인지 의문스러웠던 어떤 날의 화려한 아침 밥상처럼 나에게도 요리란 밤 동안의 실력 발휘를 하고 지친 그를 위한 보양이었다. 내가 느낀 만족감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었다. 그러한 노동이 남자들에게 특별히 섹시하게 여겨지는 지점이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을 위해 준비한 요리를 보고 처음에는 호들갑스럽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마움을 표현하곤 했지만 반복되면 될수록 당연한 일이 되어 갔다. 요리하는 내가 섹시해지기 위해서는 알몸에 앞치마만 두른 채 스테이크가 타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그를 유혹해 싱크대 위에 걸터앉아 섹스로 이어질 게 뻔 한 진한 키스를 할 때뿐이었다. 그를 위해 요리에 매진할수록 식사 후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싱크대를 정리하는 모든 뒤처리 노동까지 묵묵히 해내야 하는 그저 부엌데기가 되어 갈 뿐이었다.


그러나 요리하는 여자와는 반대로 요리하는 남자는 다른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문화와 소비를 주도하는 2~30대 여성의 취향에 맞는 남성 셰프나 연예인이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요리하는 모습이 인기를 끌면서 ‘요섹남’ 같은 신조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요리하는 남자는 섹시하다’ 남자들은 요리가 가진 성적 매력을 그대로 덧입고 여성들에게 어필하기 시작했다. ‘요리한다’라는 특성이 남성의 새로운 매력의 요소로 부각되면서 실장과 본부장으로 대표되던 로맨스풍의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의 직업군에 오너 셰프가 추가되기도 했다. (<멘도롱또똣>과 <오 나의 귀신님>은 이러한 트렌드를 재빠르게 드라마에 차용해 흥미로운 소재로 녹여냈다.) 픽션의 세계뿐만 아니라 실제 셰프의 인기도 나날이 높아졌다. 요즘 화제가 되고 인기 있는 TV프로그램의 소재는 가상연애나 육아가 아닌 요리에 집중되고 있며 셰프의 TV 출연은 요리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더욱 끌어 모았다.


요리하는 남자가 섹시하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원시시대부터 먹을 걸 구해오는 남자야 말로 몸을 던져 함께 후손을 만들어낼 밤을 보내기 딱 좋은 우성인자이지 않았는가! 이제는 수렵이나 채집을 직접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기술이 발달하고 물질이 풍족해졌으니 통상적으로 밥을 잘 사주는 남자, 거기서 더 나아가 내게 요리를 해주는 남자가 그에 대적할 만하다.


요리는 생각보다 강도 높은 노동이다. 그렇기에 요리를 직업으로 삼은 이들의 체력과 열정 그리고 일에 대한 집중력, 덧붙여 창의성까지 엿보게 되면 섹시하다는 형용을 붙이는 것이 결코 과한 수식이 될 수 없다. 사회적으로 요리하는 남자가 새로운 경향이 되고 있고 남자들 역시 요리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스타 셰프의 열풍과 일인생활자의 증가로 요리를 배우는 현대 도시남성들이 늘어나고 주방용품 시장의 새로운 소비자가 되고 있다. 그러나 요리하는 남자가 섹시하다는 건 안타깝게도 일상적으로 요리하는 남자는 여전히 그 수가 드물다는 뜻이기도 하다. 매체의 주요 소비층인 여성들은 TV속에서 근사한 요리를 선보이는 셰프나 어설프긴 해도 하나씩 배워나가며 요리를 해나가는 연예인의 모습을 보면서 나를 위해 요리해주는 남자를 바라고 꿈꾸게 된다. 요리하는 남자는 결국 무료한 삶의 이벤트이다. 섹스어필이 희소성에 있다는 말이 정답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요리를 할 줄 아는 남자가 평생 내게 요리를 해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요리는 여자의 몫, 요리하는 시간을 삶의 일부로 삼게 되는 건 여자들이다. 그렇기에 연애와 섹스의 판타지 리스트에 요리하는 남자가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요리하는 남자의 진짜 섹시함이란 목적을 성취한 후에 드러나게 되는 게 아닐까. 이 식사가 끝나고 나면 섹스 할 게 뻔 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해주는 요리를 맛있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여자는 드물다. 볼록 나온 배로 섹스에 임하게 되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곤란하다. 배에 힘을 준채로 섹스하면 성감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공복으로 임한 격렬한 섹스가 끝난 후에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게 기꺼운 마음으로 요리를 해주는 남자야 말로 내게 섹시하다는 인상을 준다. 어떤 관계는 과정이 달콤하고 애틋했다 한들 한 번의 섹스로 종결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한 번의 섹스만으로 충분하다. 굳이 또 자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자기 전엔 섹시했지만 섹스가 해소되면 애초의 섹시한 매력은 소멸된다. 진짜 섹시한 사람은 섹스 후에 결정된다. 요리하는 남자의 섹시함도 마찬가지이다. 유혹을 위함이 아닌 관계의 지속이라는 긍정적 의미와 나를 배려하고 아낀다는 신호로써의 요리라면 그것이야 말로 신뢰할만한 섹시이자, 섹스의 기술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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