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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Jul 26. 2019

제가 아니라고 했으면 궁서체거든요

우리가 남자가 없지 성욕이 없냐?


안녕하세요. J씨. 우선 이렇게 공개된 지면을 통해 인사드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사이에 사건이 발생한 후 저와 연결되어 있던 모든 채널에서 저를 차단하셨더라구요. 아니 ‘차단을 해도 내가 해야지 어떻게 네가 먼저 차단을 하냐?’ 싶은 어이없는 상황이지만 그렇게 행동한 것도 저는 받아들였으니까요. 이 공개 서신도 저처럼 이해해보려고 노력하세요.


우리는 문재인 대통령도 방문했다는 한정식 집에 가서 보리굴비도 먹고, 탁 트인 커다란 창으로 바라보는 바깥 풍경이 근사한 카페에 앉아 카페인 없는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날은 애초에 J씨와 섹스를 하기로 마음 먹고 나간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러려고 만난 사이였죠.


하필 저는 J씨를 만나기 전날과 바로 그 전날에도 넘치는 성욕을 가진 비혼 여성으로서 열심히 섹스를 한 결과, 수면 부족과 육체 피로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카페에 앉아서 졸고 있는 저를 보고 호텔에서 좀 더 편하게 자는 게 어떠하겠냐고 제안을 하며 결정적으로 섹스 동의를 유도한 것은 바로 J씨, J씨의 귀여운 차 안에서 가성비가 좋은 비즈니스 호텔을 예약한 건 저였습니다.


저의 규칙대로 트윈 베드 룸으로 체크인을 하고 저는 J씨에게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지금 제가 너무 졸리니까 딱 30분만 자고 일어나서 우리 섹스해요.” 네, 저는 J씨와 몸을 섞고 뒤엉킬 것임을 알려드렸습니다. 30분만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싱글 침대에 백설공주 포즈로 누워서 눈을 감고 잠을 청했습니다. J씨는 바로 옆 침대에 걸터앉아 저를 바라보고 계셨죠. 집요하게 저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불편해서 잠드는 게 힘들긴 했습니다. 제가 눈치 없이 미동도 하지 않고 계속 누워 있기만 하자,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같이 누워있어도 되냐며 J씨가 재워주겠다고 말했죠. 아니 제가 무슨 혼자선 잠도 못 자는 일곱 살 미취학 아동도 아니고 뭘 재워주겠다는 건지, J씨가 하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분명한 저의 요구를 전달했던 터라 말 귀는 알아들었을 거라 믿었습니다.


침대 안으로 들어온 J씨는 팔베개를 해주고 당신 쪽으로 모로 누운 제 등을 토닥거려 주셨죠. 이렇게 해서 과연 내가 잠들 수 있을까 싶은 순간 등을 쓸어주던 당신의 손은 엉덩이로 내려가고 허벅지 사이에 가 닿았습니다. 네네 이해하죠. 이해해요. 이런 일이 한두 번이었겠어요? 그 잠깐도 못 견디겠다는 듯 덤벼드는 남자, 제 앞에서 자제력을 잃은 남자는 분명 저의 어떤 허영심을 채워주는 전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날의 저는 정말 피곤했어요.


이러지 말라고 밀어내는 저의 행동이 오히려 J씨를 자극하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무반응으로 일관하자 싶었습니다. 그러면 알아차리고 그만두겠지. 목석 같이 가만히 누워있으면 이건 아니지. '발. 정. 이. 났. 다. 면' 이럴 여자가 아니라는 걸 그간 우리가 보낸 시간이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비협조적으로 나오는데도 J씨는 딱 붙는 니트 원피스를 입은 제 몸에 파고들기 위해 옷을 엉망으로 늘어나게 만들었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옷인데 그날 이후로 다시는 입을 수 없게 된 분노가 이 글을 쓰는 동력의 일부임을 이 자리를 통해 밝힙니다.


적당히 하고 물러설 줄 알았는데 J씨는 눈치가 너무 없으시더라구요. 심지어 콘돔도 쓰지 않은 채 밀어붙이시더군요. 더 이상 참아줄 수가 없었습니다. 호락호락하지 않게 방어력이 강하고 유연한 저는 몸을 빼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제가 30분만 자고 나서 하자고 했죠?” 항상 웃는 얼굴로 나긋나긋 말하던 제가 정색을 하고 물으니 당황하신 것 같더군요. 동의하지도 않았고 감흥이 없어 반응하지 않는 몸에 홀로 허덕거리는 게 저에 대한 폭력이라고 생각하진 않느냐고도 물었습니다.


순간 겁이 나셨나 봐요. 미안하다고 말은 하셨지만 그 미안은 이 순간을 모면하고 싶어 내뱉는 말일뿐, 내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계시더라구요. 곧이어 이런 상황에서 같이 있어봐야 내 화만 돋우게 될 것 같다며 도망치듯 호텔을 떠났죠. 제가 마치 무분별하게 화를 낸 사람이라도 되는 냥 저만 홀로 남겨두고 말이죠. 갈등 상황에서 문제를 회피해버리는 태도, 그 태도가 저를 더 ‘빡’ 치게 만들었지만 ‘너무’ 피곤했던 터라 J씨가 나가자마자 안락하고 고요해진 방 안에서 저는 곧바로 잠들어 버렸습니다.


두어 시간 푹 자고 일어났더니 기분이 좀 풀렸습니다. J씨가 30분을 참지 못하게 만든 저의 매력도 유죄다 싶어 조금 전 일은 해프닝으로 여겨도 될 것 같더라구요. 다시 섹스나 합시다 연락을 하려고 했더니 J씨는 이미 저를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셨더군요. 그래요. 하아, 그것도 이해해요. ‘쪽’ 팔리는 일이죠. 저만 없으면 오늘의 일은 다시 떠올리지 않아도 될 터였죠. 그 부끄러움이 당신을 진화시킬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관대한 제가 이 서간문을 쓰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J씨는 평생 자기 합리화나 하며 살 것 같아서입니다.


세상은 좁고 만날 남자는 한정되어 있어서 일까요? 어쩌다 보니 저의 지인이 J씨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자랑처럼 들려주었던 J씨의 성적 모험을 그분도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일이었을 저와의 에피소드는 아주 깊숙하게 묻혀져서 언급될 일이 없을 것 같더라구요.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저는 J씨가 묻어버렸을, 저를 비롯한 수많 여자들을 통해 반성할 기회를 가졌으면 합니다. 이 편지는 당신이 묻어버린 여자의 역습입니다. 실패를 통해서도 배우는 게 있어야죠. 없었던 일로 만들고 지워버린다고 J씨가 성공한 사례만을 가진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랍니다.


우리는 아주 야하고 즐거운 섹스를 할 수 있는 사이였습니다. J씨가 제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면 말이죠. 여자가 30분을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릴 줄 아는 것. 그만 하라고 하면 곧바로 멈추는 것. 명확한 성욕을 가진 여성의 말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죠? 부디 다음에는 이와 같은 무례를 다른 여자에게 반복하지 않길 바랍니다. 아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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