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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dnightsalon Oct 21. 2019

90년대가 공포물의 시대였던 이유

IMF, 토요 미스테리와 여고괴담 사이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은 공포물의 시대였다. 한국 경제는 IMF의 직격탄으로 비틀대고 있던 때였다. 친구들 중 누군가의 아버지는 직장을 잃었다. '아나바다​(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자)' 캠페인이 일어났고,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도 전기세를 아끼자는 취지​에서 비작동 모드로 바뀌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던 때, 경험해보지 못한 세기, 새천년이 온다는 것은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신문이며 TV를 연일 장식했고, 아이들도 만나기만 하면 Y2K​를 들먹였다.


문방구에는 이런저런 괴담이나 예언 등이 실린 손바닥 크기의 얇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런 책들은 300원이나 500원 안팎이었는데, 누군가가 한 권을 사면 반 아이들이 전부 돌려보았다.


모두가 겁에 질려 있었다. 그걸 감추기 위해서였는지, 공포물들이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주말의 명화와 보내던 토요일 밤은 토요 미스테리(1997~1999)가 대체했다. 친구들과 슬립오버 하며 보던 ⌜토요 미스테리⌟는 'Netflix and Chill넷플릭스 앤 칠' 과 같았다. 공포물은 그 당시 가장 짜릿한 엔터테인먼트였다.


토요미스테리극장 오프닝 from theqoo
토요미스테리극장 갈무리 from google search


주말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엄마와 동생 손을 꼭 쥐고선 귀신 이야기를 (안전하게) 엿보는 일이 주는 묘한 안도감. 묘한 중독성을 가진 그 안도감 때문에 나는 자꾸만 공포물을 탐닉했다. (사실 내 공포물 애정의 시작은 심은하 주연의 미니시리즈 드라마 <M>(1994)부터였는데, 그때 나는 불과 5살이었다.)

 

게다가 여름만 되면 방송국마다 납량특집을 기획했다. 운이 좋으면 ⌜전설의 고향⌟도 볼 수 있었다. ⌜전설의 고향⌟은 해마다 방영 요일이 달라지는 통에 제때 맞춰서 보기 힘든 프로그램이었다.


<전설의 고향> 화면 갈무리 from 네이버 (토요미스테리와 화면구도와 컬러가 너무나도 흡사하다...)


비디오 대여점과 영화관도 공포영화가 대세였다. <스크림>(1996)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1997) 처럼 유사한 하이틴 공포물들이 뒤이어 인기를 끌었다. 관람연령 제한이 있었을 것 같지만, 학교에 안 본 애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때도 나온 지 좀 된 영화였던 <사탄의 인형>시리즈(1988~)는 비디오 대여점의 인기작이었고, TV에서도 종종 방영됐다. <13일의 금요일>(1980~)시리즈나 <엑소시스트>(1973)같은 고전 공포물들도 끊임없이 매체에서 재소환됐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은 꽤 특별한 이벤트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TV 영화를 통해서, 혹은 입소문으로 공포영화를 접하며 주말을 보냈다.


영화 <스크림> 한국판 포스터 from 나무위키


그리고 1998년, <여고괴담>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의 공포 씬은 <여고괴담> 전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인기였다. 졸업사진에 졸업생이 아닌 사람이 찍혀있다, 졸업생 수가 안 맞는다는 둥의 학교괴담이 유행했다. 학교 천장이나 벽에 얼룩이 비치면 <여고괴담>을 떠올린 아이들이 '시체에서 나온 피일지도 모른다'며 난리법석을 부리기도 했다.


영화 <여고괴담> 포스터


하지만 사실 <여고괴담>은 <스크림>처럼 단순히 무섭기만 한 영화는 아니었다. 영화에는 당시 국내 교육의 부조리함, 무관심과 차별이 낳은 분노와 괴로움이 생생히 담겨 있었다.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아이가 수 년을 다녔던 학교는, 무섭다기보단 슬픈 곳이었다. '괴담' 은 '무서운 이야기'라기보다는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그랬다. 갓 초등학생이 되자마자 IMF가 터졌고, 아버지들이 집에 있게 된 것은 무섭다기보다는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이었던 우리는 그 두 감정들을 종종 혼동했다. 나라와 부모님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이, 그저 무섭고 슬펐다.


현실엔 무섭고 알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 있었고, TV 브라운관과 비디오 속 귀신들은 내게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화면으로 공포를 대리체험하면 현실의 공포를 어느 정도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공포물들이 '묘한 안도감' 을 주는 사이에, 지구 종말 없이 세기말이 지나갔다. 2000년이 되었지만 다행히 세상도 대한민국도 망하지 않았다. 나랏빚은 점차 상환되어갔고, 아버지들은 하나둘 다시 일자리를 찾으셨다. 아나바다 운동도 점차 잊혀져 갔다.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은 다시 동작하기 시작했고, 성질급한 사람들은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눌러댔다.


어느덧 2002년 월드컵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88올림픽도 못 본' 우리 세대에게는 최초로 경험하는 빅 스포츠 이벤트였다. 온 국민이 월드컵을 기다리는 흥분 속에, 그 많던 공포물들도 차츰 일상에서 지워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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