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르(Amour)
아내가 치매에 걸리고 남편은 최선을 다해 그녀를 돌본다. 나를 늘 챙겨주던 아내가 어느 순간 눈을 뜨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멍한 상태로 있는 모습을 볼 때 남편은 세상이 멈추었거나 꿈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내용은 영화 [아무르,Amour]는 2012년 프랑스의 거장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다. 노년의 두 부부 중 한 명이 뇌졸중에 이어 치매라는 병에 걸리고 남편이 아내의 병환과 죽음을 감당해 나가는 모습을 차갑고 냉철하게 그려낸 영화다. 아내의 병세는 나날이 악화되고 남편은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걱정하는 딸에게 "우리는 잘 해낼 수 있어."라는 말을 하며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는 오롯이 감당한다. 영화 속에서 아내는 계속 병이 악화된다. 너무 안타까운 것은 아내를 돌보는 남편의 상태도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나빠진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장례식에 다녀오는 일 외에 특별한 외출조차도 하지 않는다. 부부는 시간이 갈 수록 상대적 고립 상태에 놓이게 된다. 며칠에 한 번씩 오는 간호사와 의사, 심부름을 해주는 부부, 가끔 들르는 딸, 오래 전 가르쳤던 제자 외에는 교류하는 사람도 적다. 아늑하게 느끼며 살았을 나의 집은 질병을 앓고 있는 노년의 부부에게는 감옥과 같은 제한된 공간이 된다. 결국 아내는 집의 자신의 침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아름답거나 감동적이지 않았다. 어떤 평론가의 말처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맛보기하는 듯하여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친정엄마와 살고 있다. 그렇다고 엄마가 숙환이 깊다거나 현재 거동이 완전히 어려워 누워계시거나 하는 상태는 아니다. 엄마는 경증에서 중증으로 이어지는 치매가 있으시고 디스크와 무릎 통증으로 보행보조기가 없으면 걷기 어려우신 상태다. 이런 경우라면 어떤 경우는 자연스럽게 요양병원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내가 엄마와 함께 산다는 것을 과감하게 결정한 이유는 요양병원에서 식구들과 동떨어져서 고립감을 느끼며 돌아가시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요양병원에서 일어나는 몰상식한 노인 학대도 두렵지만 비단 그런 이유만은 아니다.
삶에 대한 존중.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동안 살아온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더군다나 삶을 마무리하는 공간이 너무 당연하게 요양병원이 되는 이 부족한 선택지에 대한 반발심이다. 87세 노인의 삶을 어디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이다. 엄마를 요양병원으로 모시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엄마는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물론 당신의 집에서 사는 것이 제일 좋다. 하지만, 병환과 치매를 앓고 있는 87세의 노인이 혼자서 집에 있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일상의 삶이 가능한가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친정엄마를 살뜰히 모시는 것은 아니다. 하루 삼시세끼를 챙기거나 온갖 수발을 드는 것은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에 함께 살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여하튼 87세 노인을 혼자 집에 두는 것은 대한민국에서는 어렵다. 나와 함께 살기 전에 친정엄마가 살고 계신 곳에서 사는 것이 괜찮았다. 왜냐하면 주변에 친구분들도 많이 계시고 아침이 되면 친구분들이 엄마가 계신 곳으로 오고 저녁이 되어돌아가서 서로를 의지하며 하루를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고 계신 집이 있는 곳에 재건축이 되면서 뿔뿔이 흩어지자 다시 모여서 서로를 의지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어떤 노인은 70년간, 혹은 80년간, 혹은 90년간 이 대한민국에서 선험자로서 일제강점기와 전쟁, imf 등을 겪으며 온갖 어려움들을 직면하고 이겨내며 살아온 그 삶을 함부로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크게 유명해지거나 이름이 난 사람은 아니지만, 이 광활한 우주에서 티끌같은 인간으로 살아왔으나 확률적으로 너무나도 희귀하지만 결국 이 지구상에서 살아낸 인간으로서의 삶을 자식인 내가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너무도 슬픈 일이 아닐까. 반드시 인정받아야만 되는 것은 아니나 늙고 병들어가며 치열하게 살아온 삶을 후회하거나 슬프게 돌아보게 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그 마지막이 조금이라도 더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영화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딸은 점점 나빠져가는 엄마의 상태에 슬퍼하고 분노한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묻는다.
"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게 지금 맞는 거예요? 뭔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니예요?"
그러자 아내의 나빠지는 상태를 보며 힘들어 하는 남편은 건조하게 되묻는다.
" 앞으로 어떻게 하냐는게 무슨 이야기냐? 나는 지금까지 하던 데로 할 거다. 일주일에 세 번 간호사가 오고 2주에 한 번씩 의사와 미용사가 올거다. 난 진지하게 이야기 하는거다."
그러자 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다시 묻는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러자 남편은 냉소적으로 묻는다.
"그럼 너희 집으로 모시고 갈거냐?"
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돌보아야 하는 노인과 함께 산다는 것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과 유사하다. 멀리서 보면 희극까지는 아니어도 그저 어떤 사람에게는 당연하고, 대단하고 더 나아가 아름답게까지 보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함께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품고 사는 일이다. 오늘 안녕한 노인이 당장 내일 아침에는 다른 모습으로 나를 맞이할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