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태명은 ‘노다지’였다. ‘금맥보다 귀한 아이’라는 뜻으로 노 씨 성을 붙여 ‘노다지’라고 지었다. 부를 때는 발음하기 편하게 ‘다찌’라고 불렀다. 다찌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엄마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던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열 달 동안은 홀몸일 때보다 컨디션이 훨씬 좋아서 계속 임신 중이길 바랄 정도였다. 심지어 출산도 참을만했다. '이 정도 고통이면 열 명도 낳겠는데?!'라고 생각하며 여유도 부렸었다. 그때는 몰랐다. 본 게임은 출산 후에 시작된다는 것을.
출산을 하면서 망가진 관절은 뼈마디를 모조리 뺐다가 다시 제자리에 쑤셔 넣는 것처럼 아팠다. 곧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병원을 일 년이나 다녀야 했다. 특히 무릎관절이 많이 상해서 자고 일어난 후에는 벽을 짚지 않으면 일어설 수도 없었다. 그 와중에 아기는 배앓이를 하느라 매일 밤 자지러지게 울었다. 모유도 안 나왔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몸이 아프다 보니 아기가 예쁜 줄도 몰랐다. 세상 모든 엄마들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식의 온갖 찬사를 갓난아기에게 늘어놓을 때는 일종의 죄책감이 싹텄다. 나는 모성애가 없는 걸까. 나만 왜 이렇게 힘들까. 괴로웠다. 육아가 이렇게 힘든 일이라고 왜 아무도 나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은 거냐고, 누군지도 모를 대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몸이 회복되면서 그제야 서서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나의 다찌’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어떻게 나에게 오게 되었을까.’ 뒤늦게 감격하며, 그동안 사랑을 충분히 주지 못한 것 같아 아기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육아는 그 후로도 첩첩산중이었고, 미성숙한 엄마는 두통약을 달고 살았다.
이 과정에서 나는 일찍이 내가 아이 둘을 키울 깜냥은 안 되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둘째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라는 인간의 바닥이 어디인지,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었는지 시시때때로 느꼈다. 아이가 없었다면 죽을 때까지 보지 못했을 '나의 민낯', 나도 몰랐던 ‘나의 바닥’을 보면서 당황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육아는 나와의 싸움이었다. 매일 나 자신과 싸우다 보니 광명이 찾아왔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고 어린이집을 다니게 되면서부터였다. 내게는 오래전부터 육아 공동체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좋은 어른들이 모여 아이를 함께 키운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겁도 없이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선택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심지어 그곳은 발도르프 어린이집이었다.
발도르프는 유아기 인지교육을 지양하는 자연주의 교육이다. 아이들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플라스틱 장난감 대신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단순한 것들을 가지고 놀이를 한다. 돌, 나뭇가지, 씨앗 등 자연물과 교사와 엄마의 온기를 느낄 수 있도록 직접 만든 인형과 뜨개 놀잇감이 주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입학하자마자 바느질과 뜨개질이 시작됐다. 뜨개질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고, 바느질은 발로 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만큼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내가 어린이집의 방침에 따라 아이를 위해 식탁 매트에 수를 놓고, 물병 주머니, 물수건 파우치, 수저 집, 놀잇감, 인형과 인형 옷을 만들었다. 어린이집이 아니라 수공예 학교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거의 매주 부모교육이 있었다. 아침에 아이랑 함께 등원해서 학부모 상주실로 쓰이는 어린이집 별채에서 하루 종일 배우고 만들다가 아이와 함께 하원을 하는 게 일상이었다. 열심히 살았고, 보람도 컸다.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를 함께 해나간다는 것은 나에게 큰 기쁨이고 즐거움이었다. 위기도 있었다. 생각이 비슷한 줄 알았던 사람들이 알고 보니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과정이 무척 아팠다. 겉으로는 비슷한 듯 보였지만 각자의 욕구가 달랐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오는 충돌이 적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인 곳은 어디나 그렇듯이 인간적인 배신감에 몸서리친 날도 있었다. 허무하고 씁쓸했다. 덕분에 인생에서 어느 때보다 인간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으며, ‘나’에 대해서 진지하게 들여다봤다.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하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나니 조금은 성장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육아를 하는 과정에서 나는 ‘엄마’, ‘여성’, ‘인간’으로서 희로애락애오욕을 느꼈다. 부족한 엄마가 울고 웃는 와중에도 아이는 잘 자랐다. 내가 아픈 만큼 아이는 단단하게 크고 있었다. 돌아보니 내가 아이를 키운 게 아니라 아이가 나를 키우고 있었다. 아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다. 그렇게 아이와 나는 함께 컸다. 아이는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알게 했고,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도 알게 했다. 아이는 내가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게, 하늘이 보내주신 '내 인생의 노다지’였다.
벌써 열 살이 된 아이와 나는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면서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다. 나를 '엄마'라고 불러주는 유일한 존재, 내가 화를 내고 무시무시한 도깨비로 변할 때에도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쏟아주는 아이가 있으니 철없는 엄마의 품도 어제보다는 조금 더 넓어지겠지! 나는 오늘도 쑥쑥 자라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