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처럼 교실문은 얌전히 닫혀있다. 나는 늘 그랬듯 자연스럽게, 교실 앞문 창틀에 손을 더듬어 열쇠를 찾아 문을 열었다. 창틀 위에 교실 열쇠가 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 빼고 다 아는 사실이므로, 잠그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그렇지가 않다. 깨진 유리창 이론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힘센 남자가 툭 치면 곧 문틀과 이별해 버릴 것 같은 미닫이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린다. 개교한 지 20여 년이 다 되어가는 학교는, 외관은 여전히 튼튼하지만 곳곳이 시름시름하다. 새로 생긴 학교들에는 있지 않은 교단이라는 것도 우리 학교에는 아직 남아 있었다.
당연히 교실은 조용하다. 규중칠우쟁론기에 나오는 바느질 친구들처럼 밤새 신나게 떠들던 책상, 의자, 칠판, 교탁 따위의 것들이 날이 새는 것을 보고 뒤늦게야 잠을 청한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 본 적도 있다. 야! 애들 올 때 됐어. 이제 그만 조용하자.
가뜩이나 산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어 을씨년스러운 학교가 더 스산하게 느껴진다. 봄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쌀쌀한 3월. 교실바닥에서는 냉한 기운이 올라오고, 닫힌척하고 있으나 사실은 어설프게 아귀가 맞지 않는 창틈에서는 찬바람이 스멀스멀 스며들고 있다. 봄방학이 시작되면서 치워버린 난로가 새삼 아쉽다. 가까이 앉으면 덥고, 멀리 앉으면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난로이지만 그마저도 없으니 교실 기운은 더더욱 냉하다.
지방에서 올라와 처음엔 아파트에 살았었다. 교통도 나쁘지 않고, 아파트라는 공간이 주는 아늑함과 단지 내 가까이 살고 있는 친구들 덕분에 편안한 학창 시절을 보내는가 싶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주택단지로 이사를 와 버렸다. 대상포진으로 고생하시던 아빠가 한동안 입원해 계시던 병원에서 이것저것 뭘 많이 주워들으신 모양이다. 아파트를 깔고 앉아 있는 건 재산 증식에 별 도움될 것이 없는 일이다, - 지금은 돈 벌려면 아파트를 사라하지만 그땐 그랬다.- 조금 더 보태서 주택을 매입한 후 월세를 받으면서 살아라, 은행이자보다 훨씬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 대략 이런 줄거리다.
워낙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성격을 지니신 아빠는 즉각 집을 알아보기 시작하셨고, 상가가 딸린 3층짜리 주택을 매입하셨다. 어쩐지 주인집 딸내미가 된다는 생각, 집이 굉장히 넓어졌다는 기쁨에 잠시 행복할 뻔했는데...... 동네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우리 집은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 가도 버스정류장이 다 멀다. 아빠야 차로 출퇴근을 하시고, 우연히 학교와 집이 가까워져 버린 중학생 오빠는 가장 늦게 집을 나서는 1인이 되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럼 나는? 무려 초등학생이 20여분을 걸어 버스를 타고 10여분을 간 후, 내려서 다시 10여분을 걸어야 한다. 버스 기다리는 시간 등등을 고려하면 1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혼자 꾸역꾸역 다녔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초등학생인데 그 먼 길을 다니며 결석 한번 안 한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게 뭐라고, 그땐 개근상이 꼭 받아야 하는 상중에 하나라고 여겼더란다.
우리 엄마 아빠는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소중한 딸, 그것도 아직 초등학생밖에 안 된 아이의 험난한 등하굣길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경제적인 이유만을 고려하여 이사 갈 집을 정해버리셨다. 아이를 키우면서 얼마나 근거리에 학교가 있는지를 따져가며 집을 구하다가 문득 이때 생각이 나서 엄마께 여쭤보았다. 엄마의 대답은? 글쎄, 그땐 다 그랬어. Latte is horse. 참 여러모로 쓸모 있는 말이다. (Latte is horse : 나 때는 말이야, 라는 뜻. 꼰대들의 전용어를 발음 나는 대로 재미있게 표현한 문장인데, 어쩐지 내가 자꾸만 쓰게 된다. 꼰대... 인가?)
그리고 얼마지 않아 중학교를 배정받았는데, 이 또한 심상치 않은 거리에 위치해 있다. 우리 집을 기준으로 아빠와 나는 정반대 방향으로 출근, 등교를 해야 하기 때문에 아빠 차를 얻어 탈 수도 없다. 나는 버스정류장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했고, 엄청난 출퇴근 교통체증을 자랑하는 경수대로를, 노선이 굉장히 길어서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이용하는 OO번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겨우겨우 손잡이 하나에 의지해 계단 끝에 매달렸다가 차가 출발한 지 몇 초 되지 않아 나가떨어지는 학생들을 한두 번 보는 게 아니다. 대부분은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들 만큼 커다랗고 무거운 가방 때문에 문이 닫히지 않아, 누군가에 의해 살짝 밀림을 당하기 때문에 그렇다. 내 몸이 차에 탔다고 가방까지 탄 건 아니라는 걸 생각하기엔, 다음 버스는 너무 한참 있다 온다. 언젠가 그 나가떨어짐을 당한 것이 여학생이고, 그러다 넘어져 교복 치마가 훌렁 뒤집어지는 것을 본 나는, 아침잠을 조금 줄이고 보다 이른 시간에 등교하기를 선택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학교에 일찍 간다고 해서 그날의 배울 것을 예습하는 따위의 모범생 같은 행동은 물론 절대 하지 않는다. 그때까지는 모범생의 범주에 들어 있던 나조차, 그런 것은 더 범생이들만 하는, 닭살스러운 짓이라 여겼던 것 같다. 그럼 친구들이 본격적으로 등교하기 전까지 적지 않게 남은 시간, 난 과연 무얼 하면서 시간을 보냈을까? 등교시간의 러시아워 어쩌고 하면서 장황하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내가 일찍 학교에 가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마음껏 오르간을 치며 노래하는 나만의 특별한 취미!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는 친구를 본 후 피아노 학원에 보내 달라고 엄마를 졸랐다. 돈 없으니 내년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2학년이 되었으니 이제 보내 달라고 했다. 아직도 돈이 없으니 내년에 보내주겠다 하신다. 3학년이 되었다. 그러나 엄마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4학년이 되었다. 여전히 나는 피아노 학원에 보내 달라고 엄마에게 졸랐고, 엄마는 나의 예상과 달리 흔쾌히 학원에 등록해 주셨다. 뭐지?
그땐 진짜 돈 때문인지 알았었는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엄마는 정말 현명한 판단을 하신 것 같다. 넘쳐나는 재능을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몇몇 특별한 아이들을 제외한다면, 너무 어릴 때부터 악기를 배우는 데에 돈을 쓴다는 것은 사실 돈지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정도 학년이 올라간 후에, 그것도 몇 년을 간절히 기다린 끝에 피아노의 세계에 입문한 나는, 빛의 속도로 실력이 향상되었던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긴 했지만, 여전히 내가 가장 애정하는 취미 중에 하나는 피아노 연주다.
학교에 음악실이 따로 있기는 했으나, 음악실에 가서 수업을 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던 것 같다. 대부분은 한층 당 하나씩 배정되어 있는 오르간을 교실로 끌고 와 선생님의 오르간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곤 했다. 음악수업 전 쉬는 시간이 되면 담당자는 – 아마도 주번이었겠지. – 복도 또는 다른 반 교실을 돌아다니며 오르간을 찾아 교실에 가져다 놓아야 한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다시 복도로 내어 놓는다.
학교에 일찍 도착한 나는 복도 어디메에 얌전히 놓여있는 오르간을 교실로 끌고 와 생각나는 노래는 다 연주해가며 혼자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러다가 다른 친구들이 오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함께 노래하기도 한다. 어쩌면 여학교여서 가능했던 일인 듯도 싶다. 남녀 공학이었다면,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내숭이 좀 필요했을 테니까.
그 악보가 어떻게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끼리는 ‘피스’라고 부르던, 누렇고 빳빳한 도화지에 인쇄된 악보를 레코드사에서 한 장당 500원에 구입할 수 있었고, 좋아하는 노래가 생기면 나는 그걸 사서 건반을 쳐보고 노래를 익히곤 했다. 그런데 그 악보는 내가 산 건 절대 아니었다. 어디서 났을까?
제목은 ‘겨울비’, 노래 부른 사람 이름은 김종서였다.
김종서라는 가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나는, 악보대로 연주를 해보고, ‘겨울비’라는 곡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꽃샘추위가 아직 가시지 않는 이른 봄날, 시린 손을 비벼가며 연주해본 그 곡은 너무 아름다웠고, 난 아직은 순수하고 꾀꼬리 같은 중딩이의 목소리로 그 노래를 부르곤 했다. 우와! 이 노래 정말 좋다!
그러나 이 노래가 나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이유는 그저 노래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였는지, 라디오에서였는지, 김종서가 부른 원곡을 들어본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깔깔깔 웃고 말았다. 뭐야, 이 노래! “겨울비처럼 슬픈 노래를 이 순간 부를까하~” 라며 시작되는 그 간드러진 음색에 나는 너무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뭔가 잔잔하고 부드러운 음색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그렇게 이 노래를 인지하고 있던 터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은 김종서라는 가수도, 그 가수의 음악도, 그 가수가 가진 독특한 음색도 너무나 좋아하지만, 락음악을 많이 접해 보지 않은, 그리고 김종서라는 가수를 전혀 모르던 중딩이 소녀에게는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고, ‘겨울비’라는 노래를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이 노래 부른 가수 목소리 엄청 깬다며, 나름대로는 최대한 비슷하게 부르려 노력하며, 친구들에게 불러주었다. 내가 느낀 감정을 그대로 전해주고 싶어서, 혹은 극대화하고 싶어서 최대한 간드러지게 불렀었겠지. 부활과 시나위를 거친 대단한 락커의 독특한 창법을 그런 식으로 희화화했다는 것이 조금은 미안하지만, 사실 뭐 그렇게 많이 미안하지는 않다. 그 덕에, 어쨌거나 나의 관심 덕에 우리 반 친구들이 모두 그 노래를 알게 되었고, 가끔 다 함께 떼창을 하기도 했었으니까. 말하자면 겨울비 홍보대사가 되어버렸으니까. 시나위 시절 김종서가 작곡하여 한번 발표를 했던 곡이고, 솔로 활동을 시작한 후 다시 불렀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지금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명곡으로 우리의 기억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그 ‘겨울비’.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아침마다 무거운 오르간을 질질 끌고 와 건반을 두드리던 단발머리 중학생 소녀가 생각난다. 오래되었지만 풍경이 좋았던 우리 학교, 뒤쪽 건물 1층이라 볕이 잘 들지 않아 유난히 추웠던 우리 교실, 촌스러웠던 자주색 교복, 하이힐을 신고 쿵쿵거리며 교단에 올라와 훌라후프를 돌리면서 종례를 해주시던 담임선생님, 쉬는 시간마다 열심히 학원 숙제를 하던 하얀 얼굴의 짝궁, 매일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빌려와 나를 만화의 세계로 입문시킨 앞자리 친구.
이제 막 이성에 눈을 뜨고, 순정만화를 보면서 마음 설레며, 아무 때나 노래를 흥얼거리던 그 꿈 많은 소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때 꿈꾸었던 대로 미래를 살고 있을까, 아니면 그렇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