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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e Kim Apr 03. 2017

멕시코, 식탁 위의 시간들

 그곳에서의 마지막 끼니

낯선 곳을 기억하는 다양한 방법


한 나라, 혹은 도시를 여행하고 난 기억은 다양한 방식으로 저장된다. 그건 때로 끝내 사진에 담는 데 실패해버린 웅장한 자연 풍경이기도 하고, 허겁지겁 길거리 음식을 먹다가 문뜩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친 눈빛 사이에 싹튼 동네 주민과의 동지애이기도 하다. 지갑을 소매치기당하는 고약한 운을 맞딱뜨리거나, 버스를 타려다 부족한 차비를 선뜻 내주는 예상치 못한 선의를 만났을 때, 낯선 곳에 대한 기억은 더욱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 좋은 오랜 트라우마 혹은 추억으로 남기도 한다.


그 많은 가능성 중에서도, 낯선 여행지에서 펼쳐지는 식탁은 공간의 기억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아주 승률 높은 공간이다. 음식이 한껏 차려진 상 위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앞에 놓여있는 음식을 핑계 삼아 낯선 이와 대화를 주고받기도 하고, 체면이라는 가면을 잠시 내려놓은 북적거리는 시장의 간이식당에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민낯을 들춰보기도 한다. 육류 및 어류의 어느 부위를 먹고 어느 부위는 버리는지를 살피면서, 혹은 익숙하지 않은 식사 예절이나 한 끼의 물가를 근거로 그네들의 삶을 요리조리 상상해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랑한다. 식욕과 쾌락의 원초적 감정, 그리고 복잡하게 진화한 사회문화적 코드가 뒤엉켜 좌충우돌하며 오고 가는, 이 세상의 모든 식탁을. 먼길 에둘러 돌아가지 않고 돌직구를 날려 이방인으로서의 경계 넘기를 시도해볼 수 있는 이 기묘한 공간을.



멕시코에서의 식탁들


멕시코에서 지낸 두 달 동안,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상을 차렸고 치웠다. 손이 큰 나는 장을 보러 나서면 늘 대식구를 먹이고도 남을 양의 재료들을 잔뜩 손에 들고 돌아오기 일쑤였고, 덕분에 집을 빌려 함께 지냈던 후안 부부와 하루가 멀다 하고 대용량 살사나 몰레 등을 나누어 먹었다. 종종 다른 가족들의 식탁에 초대되기도 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멕시코 시티의 친구들은 호쾌하게 우리를 자기의 아파트로, 혹은 할머니의 식탁으로 초대해 그들의 식탁에 우리를 둘러 앉혔다.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재료들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일 년에 딱 한 달, 우기에만 먹을 수 있다는 검은 개미 알부터 다양한 곤충 튀김, 옥수수에서 자라는 검은곰팡이 후이틀라꼬체(Huitlacoche), 그리고 선인장 볶음까지. '향토 음식', 그러니까 그 지역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사회의 많은 것을 향유해보는 일이다. 음식은 그 지역의 사람들이 살아온 사회의 환경,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독특하게 진화하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식탁은 그들이 살아온 척박한 환경을 그대로 드러낸다. 동물을 사육한 것이 몇 백 년이 채 안된 멕시코의 오래된 단백질 공급원은, 때로 개미와 개미 알, 곤충들, 그리고 옥수수에 자란 검고 끈적한 곰팡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기 없는 마른 멕시코 땅 도처에 자연스레 존재해온 선인장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고마운 채소가 되어주었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이미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듯한 쭈끌쭈글한 모양, 하나같이 거무죽죽한 색깔까지, 그 어느 것도 그다지 식욕을 자극하는 모양새라고 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 모두는 필요해 의해 시작되어 천년 넘게 이어져 온 음식들이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어느 것도 화려하거나 섬세한 맛은 아니다. 곤충 튀김은 시큼한 라임 주스나 매콤한 고추 소스를 버무려 부러 곤충의 맛을 가린 느낌이었고, 이름 모를 채소와 함께 푹 고아진 질척이는 개미 알 수프는 국보다는 죽에 더 가까웠다면 너무 야박한 평가일까. 아무래도 모험심 넘치는 시도를 넘어 이 요리들을 진심으로 음미할 수 있게 되려면, 개미 알 수프에 엮인 추억 서너개 즈음이 필요할 것 같다. 다행히 마침 제철을 맞아 집 앞 께사디야 아주머니의 행상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던 후이틀라꼬체는, 오고 가며 몇 번 먹어보고 나니 그 맛을 '배울 수' 있었다. 깊은 땅의 맛이 우러나오는 이 옥수수 곰팡이는 흡사 흙과 비의 내음을 머금은 버섯과도 같았다. 멕시코 생활을 시작한지 몇주가 흐르자, 나는 비가 온 다음 날이면 후이틀라꼬체가 들어간 께사디야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1. 옥수수에 난 곰팡이, 후이틀라꼬체(Huitlacoche)

2. 후이틀라꼬체가 가득 들어간 께사디야와 선인장 반찬

3. 일 년 중 우기, 그 중에서도 딱 한 달 동안만 맛 볼 수 있다는 개미알 수프


평소 외식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멕시코에서의 시간만큼은 의무적으로 식당을 들락거리려 애썼다.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50에 선정되고 넷플릭스의 인기 시리즈 '셰프의 테이블'에까지 소개되며, 멕시코를 대표하는 자랑거리가 된 엔리케 올베라 셰프. 우리는 그의 테스팅 메뉴 식당에 한 달을 대기한 끝에 어렵사리 자리를 얻어냈다. 멕시코 시티의 요리사들이 쉬는 날이면 모여 밥을 먹는다는 (그러니까 뭘 좀 아는 사람들의 로컬 맛집이라는) 식당에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는 수고를 하기도 했다.


미식과 혁신을 전면에 앞세운 이 미식당들은 쓴맛, 매운맛, 단맛, 짠맛, 신맛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익숙하지 않은 조합의 맛들을 이리저리 버무렸다. 때로 신선하고 때로 피곤하기까지 한? 맛의 조합들이 입 안에서 요동을 쳤다. 수년의 세월을 보내고 검고 달게 묵혀진 간장처럼, 오래 끓일수록 그 맛이 중후해진다는 몰레. 엔리케 올베라 셰프의 그 이름도 성스러운 '1007일째 숙성한 몰레 마드레(엄마표 몰레)'를 한 입 삼키며 나는 이 세상 최고의 몰레를 먹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자뭇 숭고함마저 느꼈다.


'너희 모두를 화들짝 놀래 자빠뜨려 주겠어!'라고 외치는 셰프의 비장한 각오가 귀청을 때리는 듯한 요리들이 끊임없이 식탁을 채웠다. (Costeno 고추를 섞은 매콤한 마요네즈 소스에 베이비콘을 버무리고 개미 파우더와 커피 파우더를 살짝 뿌린 다음, 옥수수 잎이 가득 든 조롱박 안에 불을 피워 훈연을 가득 입힌 후, 식탁에서 뚜껑을 짜잔 개봉하여 손님의 오감을 공격? 하던 옥수수 요리는,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인상 깊었다. 아, 물론 식당 전체가 자욱해지도록 뿜어 나오는 연기에 화재 경보가 울리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과연 멕시코에서의 두 달은, 먼 곳으로 떠나서야만 맛볼 수 있는 새로운 음식들의 향연이었다.


4. Pujol의 1007일 째 숙성시킨 몰레 마드레

5. Costeno 칠리소스와 Chicatana 개미 파우더를 뿌린 베이비콘 요리


그곳에서의 마지막 끼니


그렇게 두 달이 흐르고 멕시코 시티에서의 마지막 주가 다가왔을 때, 우리는 자뭇 비장하게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다. 계획이 틀어져 소중한 한 끼를 대충 흘려보낼 세라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엄숙하게 한 끼 한 끼를 전략적으로 '기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끼니 메뉴 후보를 꼽아야 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음식은 우습게도 처음 맛보고 참 대수롭지 않다 생각한 뽀솔레였다. 뽀솔레는 닭과 호미니 옥수수(Hominy: 알이 두꺼운 옥수수의 한 종류), 구아히요 고추, 양파, 마늘 등을 압력솥에 넣고 푹 고아낸 우리나라 닭개장 격의 스튜다. 들어가는 재료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지만, 뽀솔레는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멕시코 사람들에게 물을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손에 꼽는 컴포트 푸드(comport food)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 어떤 요리보다도 사발에 가진 재료 이것저것을 나눠 담아 만든, 든든한 한 끼 식사를 좋아한다. 앞 뒤가 똑 맞아떨어지는 섬세한 코스요리를 맛보는 것도 즐겁지만, 낯선 곳에 떨어지면 제일 먼저 찾게 되는 것은 역시나 사발에 담긴 푸짐한 그곳의 한 끼이다. 소박하지만 후한 인심으로 넘칠 것 같은 한 그릇 국수나 일품요리를 후루룩 들이키듯 먹고 나면,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다시 걸을 힘이 불끈 솟아나는 것만 같다.


멕시코에서 지내는 동안 친구의 초대를 받아 친구의 할머니와 이 국밥과도 같은 스튜를 끓여먹은 적이 있었다. 그날따라 식탁에 앉은 사람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난 말린 오레가노 가루는 절대 뿌리지 않아. 육수 본연의 맛을 해치지 않고 깔끔하게 먹는 나만의 방식이지.' 스튜와 함께 먹는 튀긴 또띠야를 두고서는 '조각조각 잘라 국물에 흠뻑 적셔 먹어야 해', '아니지, 식감이 망가지니 스튜에 넣지 말고 찍어먹어야 해' (탕수육의 부먹 찌먹 혈전과 유사) 등... 모두는 각자의 뽀솔레 철학을 내세우며 우리의 식사 방식에 훈수를 두느라 여념이 없었다.


뽀솔레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모두가 하나씩 덧붙이던 추억이 담긴 이야기들, 몇 시간째 닭을 고아 내던 솥을 열었을 때 얼굴을 와락 덮치던 훈제 고추 향이 가득했던 육수의 열기, 오후 네시가 되어서야 시작된 늦은 점심을 배 주리며 기다리다 허겁지겁 먹었던 뽀솔레의 기억... 이런 추억들이 뒤엉켜, 어쩌면 뽀솔레는 내 '힘나게 해주는 한 끼 목록'의 한 자리를 차지한 건지도 모르겠다.


당연하다는 듯이 마지막 끼니로는 뽀솔레를 먹었다. 버얼건 닭 육수 국물에 양상추, 빨간 무등의 생야채와 말린 오레가노, 숭덩숭덩 썰은 아보카도를 얹고, 마지막 날이라고 더 푸짐하게 돼지 껍질 튀긴 것도 올렸다. 그리고 튀긴 또르띠야 조각을 국에 흠뻑 적셔 한 그릇을 훌딱 비워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한 사발 비우고 나니, 왠지 이곳과 작별을 하고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힘이 생긴 것 같았다.


안소니 부르댕이었던가? "셰프들한테 죽기 전에 먹을 마지막 한 끼를 골라봐라 하면 뉴욕 맨해튼에 별 몇 개 달린 셰프의 10코스 테스팅 메뉴를 떠올리는 자식은 한 놈도 없을거야. 난 파스타를 먹을 거야. 엄마가 늘 해주던 마늘과 올리브 오일만 넣은 걸로." 그의 말처럼, 어렵게 맛 본 스타 셰프의 1007일째 몰레 마드레는 눈곱만큼도 생각나지 않았다.


6.


멕시코를 떠나고 난 무엇을 가장 그리워하게 될까.


아침, 저녁 길거리에 한두 시간 등장했다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타말 행상(Tamal: 옥수수 반죽에 살사를 부어 옥수수 잎에 넣고 찐 음식), 오후 서너 시가 다 되어 태연하게 차려지는 늦은 점심 식탁, '밥심'과 비슷한 힘을 줬던 국밥 요리 뽀솔레, 그리고 또띠야 밥, 선인장 반찬...


아마 멕시코에서의 시간은 내게 그렇게 기억될 것 같다.




직접 찍지 않은 사진 출처:

1.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HuitlaVCarbon.JPG 

3. https://fatmahkhezaimy.wordpress.com/2016/01/25/unusual-foodwhite-ant-egg-soup/white-ant-egg-soup/

6. http://2015.concursofotocapital.mx/fotos/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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