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점이 없는 영화. 읽으려 하지 말고 그저 흘러가야한다
이 영화는 정의와 불의와의 대립, 억울함과 분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딸의 살인 사건을 파헤치며 세상을 바꾸는 한 여자의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영화의 첫 장면부터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끊임없는 분석을 시작한다. 표정을 보고 감정을 추리하고 뜬금없이 등장하는 새로운 인물이나 장면이 나오면 의심하고 판단한다. 악역일까 조력자일까, 그래서 이 영화가 말하려고 하는게 뭔데?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실을 그렇지 않다. 인생이 주는 메시지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기 직전까지도 우리는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쓰리빌보드>는 살아있기에 살아가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밀드레드의 딸, 안젤라는 강간 후 죽음을 당했다. 영화는 밀드레드가 마을 외곽 대형 광고판에 범인을 잡지 못한 경찰을 비난하는 광고를 싣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이 시작에서 영화가 진행할 수 있는 두 가지 알고리즘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무능한 경찰과 물불 가리지 않는 밀드레드의 합작으로 범인을 잡는 것, 또는 부패한 윗선에
얽혀있는 사건과 이를 밝혀내려는 밀드레드. 영화는 이렇게 흘러가기에 힘든 변수를 둔다. 밀드레드가 꼬집어 비난한 경찰서장은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좋은 사람’이다. 범인을 잡지 못한 이유는 그가 나태하거나 부패해서가 아니다. 더구나 췌장암 말기인 그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암 투병 대신 조금 더 이른 죽음을 택한 그는 밀드레드에게 자신의 무능력함에 대한 사과와 응원의 표시로 전광판의 한 달치 비용을 지불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죽음을 앞당긴 주범을 광고를 실은 밀드레드로 바라본다. <쓰리빌보드>의 모든 인물은 가해자와 피해자로,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짓기에 가혹한 인생을 살고 있다. 아, 강간살인사건의 범인을 제외하면 말이다. 감정이란 것은 정해진 답이 없다. 밀드레드의 분노는 절대적으로 범인을 향한 것이지만 그녀의 인생은 이 분노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가정, 추억, 친구 등등 여러 관계로 이루어진 삶 또한 살아가야한다. 그녀는 경찰서장 개인에게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범인을 잡지 못하고 살아가야하는 이 상황을 탓하는 것이다. 시한부 경찰서장을 연민하면서도 전광판을 내리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과 억울하면서도 자신의 무능력함을 인정하고 자신만의 삶 또한 정리해야 하는 경찰서장, 남편의 죽음이 일 때문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밀드레드를 탓하고만 싶은 경찰서장 아내의 심정…… 이 영화가 극찬 받는 이유는 영화의 한 사건을 위한 플롯이 아닌 사건과 인물의 입체성을 이야기하기 때문 아닐까 한다. 영화는 메시지 하나를 정해 그것을 위해 인물과 사건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저 흘러가는 상황에 집중할 뿐이다. 이는 <쓰리빌보드>를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이유이기도 했다. 우리의 인생 또한 선과 악의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 모두는 이렇게 보면 가해자고, 저렇게 보면 피해자다. 시사점이 없는 영화, 그래서 더욱 몰입하게 된다. 누구에게 대입해봐도 기구한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