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화가 많아지는 시기가 오는 것 같다. 나의 경우, 일을 시작하고 1년 정도 지났을 때, 그 시기가 왔었다. 주위에서 "왜 이렇게 화가 많아졌어?"라고 종종 물어볼 정도로 욱하는 성격이 나왔었다. 이 시기, 아무리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보려고 노력해도 모든 게 삐뚤어지게 보였다. 다행히 6개월 정도 지나자 속에 있던 분노는 많이 사라지고 원래의 차분하되, 밝은 성격으로 돌아왔었다.
꾸준히 운동하기, 감사하는 목록 써보기, 약속보단 독서하기
분노가 많던 시기 나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다. 분노는 땀 흘리고 운동하면 정말 많이 가라앉는 거 같다. 입사하고 초기 1년 동안은 회사 적응하느라고 퇴근하면 녹초가 되어 잠들기 바빴다. 회사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서 시작한 운동은 필라테스였다. 레깅스를 입고 반팔티로 입고 처음 리포머 위에 앉았을 때, 새로운 운동 시작에 얼마나 설레던지... 그리고 요가와 같이 천천히 부드러운 운동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활동적인 운동이었다. 얼굴에서 정말 물 떨어지듯이 땀이 흘러서 한 번은 선생님이 내가 흘리는 땀을 보고 "어머 회원님 우세요?"라고 했었다.
욱하는 성격을 다루기 위해서 했던 또 다른 행동은 감사하는 목록 써보는 것이었다. 입사하기 전, 어디라도 합격만 시켜주면 이 한 몸 받쳐 일하겠다고 다짐했건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생각보다 덜 중요한(?) 반복적인 일을 하다 보니 '내가 이러려고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가고 취직했나'라는 생각을 정말 자주 했었다. 이러한 생각이 자리 잡으니 온 머리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부품같이 느껴지고, 이러한 일을 앞으로 30년 넘게 해야 한다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아마 이런 행동이 화가 많아지는데, 하나의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이를 멈추기 위해 매일 아침 출근버스에서 나 자신을 우쭈쭈 해주기 시작했다. 나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회사에 다닌다! 나는 퇴근하고 꾸준히 운동하는 웰빙 라이프를 즐기고 있다! 등등 별거 아닌 거라도 계속 나는 대단하다!라는 인식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을 줄이고 내면의 성숙을 위해 시간을 썼다. 친구들을 만나면 만날 당시 너무 즐겁고 시간 가는 걸 모르겠지만, 그러한 즐거움은 깨진 그릇에 물을 붓는 기분으로 약속이 끝나면 다시 삶에 대한 허망함으로 화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친구 만나는 시간을 줄이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너무 싫어해서, 1년에 1권을 읽을까 말까 했는데, 직장인이 되고 나서 오히려 책 읽기를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꾸준히 해오고 있는 거 같다. 부동산 책, 주식투자 책 등 재테크 관련 책보다는 자기 계발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책을 읽으면서 삶에서 보이지 않는 가치를 채우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 같다.
위와 같은 방법들로 화를 다스리고 나서 '왜 저 시기에 유독 화가 많아졌을까, 입사 초기에 나만 저렇게 변한 거면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해보니 꽤나 가능성 높은 한 가지 답을 찾게 되었다. 입사 초기 나에게는 취준생 때부터 사귀던 남자 친구가 있었다. 그는 연애 2달 차부터 엄청난 '욱하는 성격'을 드러냈었다. 나는 평소에 남에게 잘 맞춰주는 둥글둥글한 성격이었기에 그가 툭하면 화내도 모두 받아주며 달래줬었다.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생각했는지 욱하는 빈도가 더 자주, 강도도 더 심해졌었다. 사람은 상대방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가 나에게 던졌던 화들이 나를 통해서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대화를 하다 보면 정말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트러블이 생기곤 했다. 퇴근하고 그와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도 갑자기 "왜 말을 그렇게 해?" 하면서 훅 공격해 들어오면 화가 나기보단 너무 황당하여서 먼저 사과하고 마무리지었었다. 전화를 끊고 나면 '이거에 왜 화가 나? 왜 내가 사과했지?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생각들이 항상 올라왔었지만, 싸우기 싫어서 참고 지나갔었다. 지금까지도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에피소드>
당시 나는 그가 다니고 있던 회사에 합격하여 첫 연수를 다녀온 날이었다. 금융회사가 어느 정도 보수적이고 수직적인 문화라는 것은 알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보수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온 날이었다.
나 : 오늘 처음 연수 다녀왔는데, 엄청 보수적인 것 같아요..
남친 : 처음이라서 군기 잡으려고 그랬겠지.
나 : 아니, 그래도 의자 등받이에 등 댔다고 지적하고, 어디서 다리 꼬고 앉냐고 하는 거 너무하지 않아요? 우리 보고 너희는 회사에서 제일 막내들이라고 몰라도 무조건 90도로 인사하고, 말은 다나까만 하라고 하는데, 나 진짜 군대 다녀온 줄 알았다니까요ㅜㅠ 어떻게 이렇게 다녀요..?
남친 : (갑자기 욱하며) 내가 다니는 회사인데 욕하지 마.
나 : (벙쩌서)..? 아니.. 내가 오빠를 욕한 것도 아니고, 회사 분위기가 너무 보수적이어서 말한 건데, 그리고 아무리 본인 회사여도 여자 친구가 다녀와서 충격받았으면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나는 그러면 오빠한테 힘든 거 공감받지도 못해요?
남친 : (목소리 더 높이며) 지금 내 앞에서 내가 다니는 회사 욕한 게 잘한 거라고 생각해? 나는 그냥 네가 투정 부리는 거로밖에 안 보여, 회사 다닐 거면서 그 정도도 못 이겨내?
나 : (한숨 쉬며) 알겠어요... 이제 오빠 앞에서는 회사 욕 안 할게요.
첫 연수를 다녀와서 생각보다 다른 문화에 충격을 받은 연인이라면 당연히 공감해주고,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나에게 오히려 화를 냈다. 나는 싸워봤자 서로에게 상처만 남을 거라고 생각해서 먼저 사과를 하고 상황을 마무리지었다. 지나고 보니 이러한 화들을 다 받아주다 보니 내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고 쌓여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예전에 들었던 강의에서 이런 내용이 있었다. 회사에서 후배에게 화를 내면 그 화는 결국 그 후배의 아이에게 돌아간다는 말. 화라는 것을 표출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들어가고, 상대방이 품어내지 못하면 결국 계속 화풀이가 지속되며 결과적으로 집에 가서 본인의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게 되고, 가장 약자인 아이가 다 받아들이며 화가 많은 아이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욱하는 남자를 사귀어보니 그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물론 나도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를 할 수 있었겠지만, 다행히도(?) 나는 내 속에서 썩힌 것 같다. 그리고 그 화는 내가 그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도 계속 남아 결국 입사 1년 후에 터진 것이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이 이유도 절대 무시하지 못할 것 같다.
나는 이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4번의 연애를 더 했는데, 항상 1순위 기준은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남자'였다. 화가 많고,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을 만나면 나와 그의 관계에서 문제가 끝나지 않고, 다른 인간관계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몹시 중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했다. 저런 사람과 연애하게 되면 연애 매 순간, 편암함보다 긴장감이 유지되는 것 같다. 통화를 하다가도 언제 어떻게 화낼지도 모르고, 데이트마다 본인의 기분에 따라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처음 만나면 오늘 그의 기분은 어떤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현재 하고 있는 연애가 과거의 나처럼 감정 쓰레기통 같다면 다시 생각해보길 바란다. 그가 나에게 뿜어버린 화가 어쩌면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자제하려고 해도 화는 비집고 나와서 남을 공격할 수 있다. 나를 동등한 상대로 존중해준다면, 그는 쉽게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연애를 유지하고 싶다면 그의 이유 없는 화를 그만 받아주고, 그 화를 쳐내길 바란다. 연애는 함께하는 것인데, 왜 나만 이 연애를 유지하기 위해서, 싸우기 싫어서 이 화를 다 받아줘야 하는 것인가, 그만 받아주면 그도 무엇인가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욱하는 성격을 스스로 조절하려고 하면 정말 베스트 케이스가 될 것이다. 최악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욱에는 욱으로 대응하자 연애의 손을 놓으려고 한다면 본인도 놓아버리길 바란다. 감정 변동성이 적은 사람을 만나면 훨씬 편하고 안정적인 연애가 가능한데, 힘든 연애를 억지로 붙잡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