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살아남기
셀레나가 떠나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우리의 마지막 식사를 찜닭으로 마무리했다. 셀레나를 처음 만났을 때 먹은 음식도 닭볶음탕으로 닭요리였다. 닭으로 시작해 닭으로 마무리하는 우리의 관계는 또 언제 다시 재회하게 될까. 셀레나가 없는 호주라니 상상도 안 해봤다. 셀레나와의 친분으로 얻은 교훈이 참 많다. 나는 스스로 자기 객관화가 나름 잘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객관화가 조금 느린 편이다.
셀레나는 내 첫 외국인 친구이기 때문에 나에게 언제나 특별한 사람이었다. 물론 셀레나만큼 내 한국 친구들도 누구 하나 우선이랄 것 없이 모두 특별했다. 그래서 내가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나의 존재도 특별하길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내 10년 지기 친구가 "야 왜 너는 네 외국인 친구만 그렇게 특별하게 대해줘?"라는 애정 섞인 질투를 토로했다. 그제야 나는 '여러 명의' 특별한 친구들을 두면서 그들에게 '나만' 특별하길 바라는 건 이기적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대로라면 나는 열명 스무 명의 친구들을 사귀더라도 그들은 '나'라는 친구 한 명만 있어야 하니까. 물론 그들에게 나를 특별하게 대해 달라며 떼를 쓰거나 다른 인연이 생기지 않게 방해를 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냥 속으로 바랄 뿐. 그럼에도 제삼자에게는 분명했나 보다. 나의 행동이 누구를 향하고 있었는지. 그 후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혼자 마음속으로 누군가에게 특별하길 바라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알게 됐다. 그렇게 나는 남몰래 가지고 있던 인간관계에 대한 집착을 조금씩 내려놓게 됐다.
셀레나의 짐 정리를 도우러 왔다. 온 김에 차이나타운에 새로 생긴 타르트 집에서 밤과 딸기 맛 타르트를 사 왔다. 오른쪽은 아몬드 크로아상이다. 이상하게 호주에서 바나나브레드와 이 아몬드 크로아상이 유명하다. 어느 카페를 가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크로아상 위에 소보로빵 같이 달달한 크럼블과 아몬드가 올라가 있다. 내가 참 좋아했던 호주 간식 중 하나다. 크로아상을 먹기 편하게 가위로 싹둑싹둑 잘랐는데, 셀레나가 이것을 보고 'the most Korean thing'이라고 했다. 가위로 음식을 자르는 것이 서양문화에서는 굉장히 어색한 일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호스텔이나 어딜 가더라도 주방에 가위가 있는 경우는 드물었던 거 같긴 하다. 고기도 바비큐보다는 스테이크처럼 썰어먹는 문화가 발달해서 그런가? 나는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련다.
7년간의 짐을 겨우 30인치 캐리어 4개에 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파트 내에 있는 쓰레기 장을 수십 번을 오르내린 후에야 조금 정돈된 모습이었다. 셀레나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인간이 가장 큰 환경파괴의 주범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쩔 수 없이 소비하는 것들이 있으니 말이다.
짐 정리를 겨우 마친 다음날, 셀레나는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출국 전 호텔 1박을 예약했다고 했다. 셀레나가 묵는 호텔에 잠깐 들어가 소소한 파티를 했다. 2년 전 셀레나와 처음 헤어짐을 맞았을 때도 길가에서 엉엉 울었다. 이날 진짜 작별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마 그 눈물은 내가 셀레나에게 그만큼 많이 의지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셀레나가 떠나고 나도 시드니에서의 삶을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호주에 더 오래 머물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워홀 비자는 워킹홀리데이 협정을 맺은 국가당 평생 한 번, 대개 1년씩 체류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호주의 경우 두 번 연장이 가능한데, 첫 워홀 비자(First WH) 소지 기간 동안 88일의 특정 직업군에 종사하면 세컨 비자로 전환 가능하며, 세컨(Second WH) 비자 소지 기간 동안 180일 동안 일을 하면 써드(Third WH) 비자로 연장이 가능하다. 그래서 호주 워홀은 최장 3년 동안 체류가 가능하다.
그러나 비자를 그리 쉽게 내주지는 않을 터. 특정 직종이라 함은 농업, 어업, 광업, 산불 피해 복구 작업 등 일손이 필요로 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많은 워홀러들이 마치 통과의례처럼 농장 혹은 공장에 가는 것이다. 아예 처음 도착하자자 농. 공장으로 빠져 88일을 채우고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연장을 하게 될지 안 할지도 확실치 않았기에 일단 살아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1년이라는 시간은 한 없이 짧기만 했고, 만약 내가 어떤 터닝포인트가 필요하다면 그건 가장 의지했던 친구가 떠난 지금이 가장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도 그만두고 2주 정도 휴식기를 가지며 살던 집, 동료, 친구들을 순회하며 시드니에서의 생활을 조금씩 마무리해 갔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세 달 정도 내리 일만 하다가 시드니로 돌아오면 될 것 같다고. 시드니가 아니라면 또 다른 도시에서 새 출발을 하면 될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곧 떠난다는 소식을 알리자 탄튼이 친구들과 함께 라페루즈로 당일치기 여행을 가자고 했다. 시티에서 한 시간 좀 안 되는 관광지인 라페루즈는 미션 임파서블 촬영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2년 전 워크숍으로 왔을 당시 블루마운틴, 킹스 테이블, 포트스테판 등 웬만한 투어스팟은 다 가본 사람으로서 색다른 시드니 여행을 하고 싶었던 참이었는데 잘됐다고 생각했다. 3개월 뒤에 보자고 작별인사를 고했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 바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다. 약 3개월 만에 그만두는 게 너무 아쉬웠다. 이곳이라면 내 비자가 만료될 때까지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박수 칠 때 떠날 줄도 알아야 한다. 비자를 연장한 후에 내가 시드니에 다시 돌아온다면 그때 이력서를 다시 내밀어볼 생각이었다.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가져온 카메라를 내밀었고 나딘이 먼저 그룹사진을 남기고 싶냐고 물었다. 비록 캐린이 오프인 날이라 함께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무언가 남겼다는 것 만으로 기뻤다. 퇴근준비를 하던 마테오도 냉큼 달려와주었다.
사진을 찍고 난 뒤 퇴근할 채비를 마치고 진짜 작별인사만 남았을 때, 입을 떼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사실 하루 종일 일하면서 마지막 근무라는 생각만 하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었다. 특유의 장난스러운 말투로 "What are you doing?"이라며 모른 척을 하던 나딘도 끝내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It's not goodbye,
It's always see you later
나는 이때 헤어짐의 의미를 다시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이후로 만나게 될 인연과 어떤 헤어짐을 하든지 잘 울지 않게 됐다. 헤어짐에 무뎌져서도 아니고 그 사람과의 관계가 얕기 때문도 아니다.
단지 그건 더 이상 안녕이 아니라 다시 만나요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