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살아남기
시드니 달링하버에서 매주 토요일 8시에 불꽃놀이를 약 15분간 진행한다. 함께 방을 쓰는 콜롬비아에서 온 카밀로와 독일에서 온 안나에게 시티 구경시켜 줄 겸 왔다가 호스텔 스태프를 만났다. 특히 카밀로는 집에서 정말 정말 나가기 싫어하는 집돌이인데 나와주어서 조금 감동이었다. 남미친구들은 대부분 영어실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서 노동직에 일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리고 남미국가의 경우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기가 정말 까다롭기 때문에 정말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학생비자를 신청해 들어와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카밀로도 낮에는 비자용 비즈니스스쿨을, 새벽에는 물류센터에서 일을 한다. 생활력이 정말 남다르다고 느꼈다. 보아하니 인플레이션이 남미 경제에 큰 타격을 준 것 같았는데 타국에서 살아남아야만 하는 기분은 어떨지 감히 상상도 안된다.
먼저 떠난 셀레나가 나를 위해 남겨놓은 친구가 있었다. 메이. 필리핀 사람인데 호주 영주권자이며 한국인 남편을 두었다. 나는 이들의 러브스토리를 꽤 좋아한다. 오래되어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메이는 현 남편 전에 사귀었던 남자 친구도 한국인이었는데, 굉장히 안 좋게 헤어졌다고 했다. 그 뒤로 한국남자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게 형성되어 있었을 때 즈음 지금의 남편이 나타난 것이다. 쉽게 열리지 않는 마음을 열어보게 다며 끊임없이 구애를 했는데, 메이는 매몰차게 거절하고 부모님을 보러 필리핀으로 갔다. 그런데 며칠 뒤 필리핀까지 메이를 보겠다며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것이다. 이런 진심에 메이도 그분의 마음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메이 집에 몇 번 놀러가 남편분을 뵙기도 했는데,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순박하고 착한 분이었다. 소극적인 성격의 메이는 정말 몇몇의 친구만을 둘 정도로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메이를 위해 언제든 놀러 와도 좋다고 해주셨다.
시티에 한국식 고기 뷔페가 있다고 해서 왔다. 베트남계 프랑스인 멜라니와 이탈리아에서 온 로베르토와 함께 했다. 로베르토는 이슬람혈통이라 돼지고기를 먹지 않아 불판의 가장자리를 이용해 소고기를 따로 구워 먹었다. 그러고 보면 종교라는 것은 참 신기하다. 무교인 나로서는 어떻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한 사람의 가치관에 자리 잡을 수 있는지, 살면서 의심해 본 적 없는지, 너무 궁금했다. 운 좋게 기념일과 맞물려 롤케이크도 서비스로 받았다.
안나와 트리샤언니와 함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마키아토 피자집에 왔다. 나는 제일 좋아하는 마르게리따피자를, 안나와 트리샤 언니는 비건 피자를 주문했다. 비건 피자에는 토마토소스 대신 단호박 소스가 들어간다. 비건이라고 하면 맛없는 것만 먹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내 피자 못지않게 비건피자도 맛이 좋았다. 여기서 비건인 친구들을 많이 보았는데, 자신의 신념에 의해 인생에서 한 가지를 포기하고 산다는 게 정말 존경스러웠다. 과연 나는 어떤 한 가지를 포기하며 살 수 있을 정도로 소신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매일 밤이 되면 호스텔 커먼룸에서 소통의 장이 열린다. 보드게임을 하기도 하고 춤도 추며 말이다. 호주가 국경을 개방한지 몇 개월쯤 되었으려나 전 세계에서 워홀러들이 물 밀듯 들어와 시드니에서 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상황이 되었다. 정말 운 좋게 인스펙션을 가면 혼자가 아니라 최소 열명 이상 투어를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누구 하나 예외랄 것 없이 호스텔에서 장기투숙을 하게 됐고 누구보다 좋은 친구이자 가족이 되었다. 사실 다른 것 보다 내가 마음 놓고 지낼 수 있는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 꽤나 크기 때문에 며칠, 혹은 몇 주마다 방을 옮겨다녀야하는 호스텔에서 지내는 것이 마냥 편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바로 '좋은 사람들' 덕분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