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 그리고 나의 일
나는 지금 싱가포르에 있다. 한국에서 시작해서, 두바이로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또 한국을 떠나, 싱가포르에서, 자카르타를 거쳐, 다시 싱가포르. 요리사는 이동한다. 때로는 선택으로, 때로는 강제로.
처음은 케이터링이었다. 급식. 화려하지 않았지만, 나름의 시스템이 있었고, 규모가 있었다. 대량으로 음식을 만드는 법을 배웠고, 효율을 배웠고, 시간과의 싸움을 배웠다. 이게 내 시작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다.
두바이 호텔. 프리 오프닝 팀. 나는 처음으로 국경을 넘었다. 케이터링에서 호텔로, 한국에서 두바이로. 심지어 이번 이동이 나의 첫 해외로 출국이었다. 25년 동안 한국만 알았던 내가, 처음으로 외국을 밟았다. 회사 숙소에서 팀원들과 함께 살았다. 아침에 같이 일어나고, 같이 출근하고, 같이 퇴근하고, 같이 저녁을 먹었다. 마치 학교 다니는 기분이었다. 기숙사에 사는 요리학교 학생 같았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주방, 새로운 나. 일 자체는 무지막지 하게 힘들었다. UAE 자체가 노동자들이 자국민들을 위한 노동을 도맡아 하기에 임금은 낮고(정말 낮다 한국의 거의 1/4 급여였다. 물론 진급하면 가파르게 오르고 또 진급도 빠르다) 언어 역시 소통의 주는 영어지만 여러 언어가 정말 뒤죽박죽 섞인 곳이었다, 뉴욕이 인종의 멜팅팟이라면 두바이는 정말 언어까지 그러하다.
그렇게 한 해가 끝나갈 때 즈음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많이 아프시다." 나는 짐을 쌌다. 프리 오프닝을 마치고 여러 행사를 같이 하고, 힘드었지만 해외 생활은 나에게 단점 보다 장점이 더 크게 느꼈다. 그렇지만 나는 돌아가야 했다. 두바이의 태양 아래서, 나는 다시 한국행 비행기표를 샀다. 그렇게 짧은 1년의 해외 생활을 정리 했다.
나는 다시 한국 주방에 섰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케이터링이 아닌, 파인다이닝. 미쉐린을 노리는 레스토랑. 그리고 우리는 별을 받았다. 미쉐린 스타. 축하 파티가 있었고, 사진을 찍었고, 언론이 왔다. 예약은 늘 빠르게 채워졌다. 케이터링에서 시작한 내가, 별 하나짜리 레스토랑의 주방에 서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나는 독감에 걸렸다. 38도가 넘는 열, 온몸이 쑤시는 통증, 숨쉬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는 주방의 전쟁터다. 예약은 풀이고, 나는 빠질 수 없었다. 병원에서 주사 한 대 맞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서비스 중에도 열이 났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나는 접시를 내보냈다. 저녁 바 행사가 끝날떄 까지 나에게 자정이라는 시간은 그저 멀게 흘러갔다.
며칠 후, 다른 직원들도 독감에 걸렸다. 아마 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연차를 냈다. 쉬었다. 나는 쉬지 못했다. 아니, 쉬지 않았다. 그리고 몸은 회복되지 않았다. 후유증은 내 마음에도 그렇게 남아버렸다.
독감이 지나가고 몇 주 후, 나는 깨달았다. 미쉐린 스타도, 두바이의 경험도, 아무것도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독감에 걸려도 일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옮겨도 쉴 수 없고, 몸이 망가져도 계속 서 있어야 하는 것. 이게 별 하나짜리 주방이었다. 나는 마음속의 구멍을 매울수도 바라봐도 그냥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일하기 싫어졌다. 주방이 싫어졌다. 요리사라는 직업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나는 그 레스토랑을 떠났다. 그리고 떠돌았다. 여러 주방을 전전하고. 다른 일로 기분 전환도 해봐도 정착하지 못했다.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미쉐린 스타를 받은 주방에서 일했던 경력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는 그저 하루하루를 버텼다. 한국 어딘가의 주방에서.
그리고 나는 다시 국경을 넘었다. 싱가포르. 프리 오프닝 팀. 두바이가 첫 탈출이었다면, 싱가포르는 재출발이었다. 또 새로운 주방, 또 새로운 얼굴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나는 더 이상 순진하지 않았다. 별이 뭔지 알았고, 독감으로 일하는 게 뭔지 알았고, 몸이 망가지는 게 뭔지 알았다. 그래도 나는 여기 있었다. 싱가포르의 새 주방에.
그리고 나는 자카르타로 갔다. 새로운 기회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도시, 또 다른 주방. 하지만 자카르타는 달랐다. 2주 동안 쉬지 못했다. 하루 15시간씩 일했다. 주방에서 나오면 자정이 넘었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마이크로 매니징. 모든 것이 감시당했다. 모든 것이 통제당했다. 내가 뭘 하는지, 어떻게 하는지, 왜 그렇게 하는지. 그리고 매달 한 번, 일이 끝나고 저녁 12시부터 전체 미팅. 새벽 2시까지. KPI 보고, 재고 조사, 실적 분석. 다음 날도 아침 일찍 출근. 미친 것 같았다.
어느 날 다른 직원의 월급을 들었다. 아무리 내가 책임자라고 해도 나를 제외 한 9명의 주방 직원들의 월급을 다 합쳐도 내 월급보다 적었다. 심지어 나의 월급이 엄청 높은것도 아니었는데, 정말이지 처참했다. 쉬는 날도 없이 일하고, 새벽까지 미팅하고. 그 대가가 이것인가. 나는 그때 깨달았다. 이건 주방이 아니라, 공장이었다. 아니, 공장보다 못했다. 공장은 적어도 근로기준법이 있다.
나는 버틸 수 없었다. 두바이도 견뎠고, 한국에서 독감으로 일한 것도 견뎠지만, 자카르타는 견딜 수 없었다. 몇 달 후, 나는 다시 짐을 쌌다. 싱가포르로 돌아가기로 했다. 자카르타의 악몽에서 깨어나듯, 나는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케이터링에서 시작해서, 두바이로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왔고, 다시 싱가포르로, 자카르타를 거쳐, 또 싱가포르. 다섯 번의 주방. 다섯 번의 선택, 또는 강제. 나는 아직도 이동 중이다. 다음이 어디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주방의 차가운 젖은 타일 위에 서있을까 궁금하다. 지금은, 오늘은, 여기 싱가포르에 있다. 주방에서 근무 한 뒤 연말에 있는 나의 생일은 이제 나에겐 크게 의미 없는 바쁜 12월의 하루일 뿐이었다. 그래도 나의 생일을 묻고 기억해 주는 동료들과 하루 빼서 바비큐 파티를 하기로 했다. 어디서 정착 할지 아예 유목민 같은 생활을 할지 모르는 미래지만 그래도 좋은 기억 하나 그리고 마음속에 정착할 사람들이 있다는게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