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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Dec 22. 2016

빛과 어둠

체코 '프라하(Praha)'

본격적으로 한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도시의 불빛에 실리는 감정도 다채로워진다. 추억을 더듬으며 나누는 따뜻한 위로, 산타 할아버지를 상상하는 아이들의 설렘, 케이크를 고르며 달아오르는 마음, 조기 퇴근이나 휴가에 대한 기대 같은 것들. 그래서일까, 반대편에 선 상실감이나 외로움도 더욱 선명해진다.

서른을 넘기고도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 수 있을지 막막한 겨울이었다

- 도종환 '스물 몇 살의 겨울'



Praha

한 겨울에도 강추위에 맞서는 여행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도시. 온라인에 넘쳐나는 여행 정보 덕분에 이미 다녀온 것처럼 익숙하기도 하다. 시간이 빠듯한 여행자에게도 썩 괜찮은 크기, 인생 사진을 남기고 싶은 이들을 만족시켜줄 만한 풍경, 긴장된 마음을 풀어줄  맛있는 맥주, 마음 아픈 역사까지, 여행자의 마음을 붙잡는 것들이 가득한 곳이다.


붉은 지붕이 검게 물들어간다. 햇빛이 머물던 자리에 불빛이 둥실 떠올라 도시를 비추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마침표를 찍을 시간이지만, 도시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깊은 밤이 도착할 때까지 마냥 타오를 불빛.


초단위로 기온이 내려가는 듯한 추위에도 소란스러운 거리. 이방인들의 동선이 대개 비슷한 탓에, 사람들이 모여있을 법한 곳들은 어딜 가나 후끈했다. 귀가 얼얼해지고, 손의 감각이 둔해져도 놓칠 수 없는 야경.



크리스마스 불빛이 더해진 구시가지는 여느 때보다 더욱 화려하다. 놀라운 문화유산에 안타까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통 이렇게 눈부신 것들 뒤에는 잊힌 것들이 있다. 스러진 목숨에 대한 이야기는 부지기수. 진실이 상상보다 추할 수 있음을 깨닫는 요즘, 아름다움을 독점하고 싶은 마음에 시계 장인의 눈을 멀게 했다는 이야기가 소설인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슬퍼하는 이는 넘쳤으나
잘못했다고 말하는 이는 없이 여름이 지나가고
숲의 나무들만 여러 날씩 몸부림치며 울었다

- 도종환 '그해 여름'



아기 천사가 나팔을 불어주는 따뜻한 밤이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면, 적막이 가득했던 날들을 발견하게 된다. 반짝했던 ‘프라하의 봄’은 꿈처럼 사라지고 긴 겨울이 찾아왔다. 성당의 첨탑 위로 크리스마스 또한 여러 차례 지나갔다. 그토록 짙은 어둠이 세월에 마모되어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벨벳 혁명(Velvet revolution)’이라는 이름으로 프라하에 도착한 자유의 빛.  

우리가 어찌하지 못하는 시간 말고
천천히 바뀌며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는
또하나의 거대한 시간 쪽을 향해

- 도종환 '환절기'



눈물이 모여 도시의 빛이 되었다. 밤거리의  우리들은 그 시절을 알지 못한다. 꺼지지 않는 불빛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광장을 누비고, 다리를 건넌다. 소원을 이뤄주는 동상에 달려들기도 하고, 자신의 마음을 노래에 실어 나르기도 한다. 좀 전에 거닐었던 광장을 회상하며, 먼데서 빛나는 도시를 카메라에 담는 이들도 있다.



연말이면 고조되는 감정 때문일까, 막상 새해를 맞이하면 사는 게 시들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올해는 익숙한 감정에, 또 다른 것들이 더해졌다. 분노와 자괴감, 간절한 희망 같은 것들. 1989년 겨울, 비폭력 시위로 자유를 품에 안은 프라하의 얼굴에 우리의 모습을 겹쳐본다. 그들은 부드러운 벨벳으로 묘사되었으니, 우리는 빛나는 촛불로 표현하면 될까.

물결이 멈추지 않아 우리도 멈출 수 없다 출렁이는 합창 아프고 쓰라리고 높고 장엄한 그 노래를

- 도종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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