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시골집 & 찻집
전염병이나 전쟁의 위협이 줄어든 시대라 해도 녹록지 않은 삶이다. 오늘도 수십 명의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했다. 교통사고와 강력범죄도 끊이지 않는다. 무탈한 하루를 보냈음에 안도하며 현재를 저당 잡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가능한 좋아하는 것을 즐기며 살겠다는 마음으로 준비한 겨울 휴가.
달이 차오른다 가자
달이 맨 처음 뜨기 시작할 때부터
준비했던 여행길을
-장기하와 얼굴들, 달이 차오른다 가자
조용한 섬마을에 위치한 시골집으로 출발. 오랜 시간 머물러도 좋을만한 곳으로 정했다. 주인장의 세심한 손길이 담긴 집이다. 쓸데없이 더하지도 빼지도 않으려고 애쓴 듯한 인상을 받았다. 겨울바람의 기세에 눌린 탓에 마당에서 놀아볼 용기는 없었지만, 해먹과 평상이 지닌 '여유'로운 이미지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옆집에는 검은 개 한 마리가 마당을 차지하고 있었다. 선한 눈매와 발랄한 꼬리를 가진 녀석. 처음 만났을 때는 왕왕 짖기만 하더니, 다음부터는 높은 돌담 위로 몸을 뻗어 우리를 반겨주었다. 집에 드나들 때마다 인사를 나누던 사이. 내 멋대로 친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어쩐지 문고리가 헐거운 우리집까지 지켜줄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침대를 버리고 후끈한 방바닥으로 뛰어들었다. 명절마다 머물렀던 할머니 집 안방 같다. 넘치는 손주사랑으로 절절 끓었던 방. 엉덩이가 데일 것 같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감당할 수 없는 뜨거움에 화들짝 놀랐는데, 이제는 ‘지진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따뜻한 방을 굴러다니는 잉여인간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 느긋하게 보내리라. 책장에서 마음에 드는 책 몇 권을 골라집었다. 머리맡에 적당히 늘어놓은 채 배를 깔고 엎드린다. 냉장고는 이미 채워두었다. 기분이 묘하다. 내 집이 아닌 곳에서 익숙한 행동을 해서일까. 아니면 시계가 없어서 현실감각이 떨어진 걸까.
얼굴이 달아오르면 찬바람을 쐬고 돌아와 다시 눕는다. 바깥의 공기가 차갑긴 하지만, 문간의 털신은 좀 과하다 싶다. 신발만 봐서는 한라산이라도 다녀올 기세다. 하지만 부엌 창문으로 보이는 마을 풍경에 제주도임을 실감하며 다시 구를 뿐이다. 창문을 휘감는 바람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배경음악을 대신한다. 그야말로 고요하고 소박한 하루다.
꼬박 하루를 마냥 뒹굴며 보냈다. 한적한 카페로 마실을 나갈 차례. 해변 카페는 잉여를 꿈꾸는 도시인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날이 좋으면 좋은 대로, 궂으면 궂은 대로 그만의 낭만이 있다. 노란 불빛 아래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창 너머의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애써 찾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찻집에 도착했다. 바다 쪽에서는 어떠한 표지도 찾기 힘든 카페. 마을 쪽 입구에만 조그만 간판을 달아두었다. 손님을 ‘적당히’ 받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해녀 작업장으로 쓰이는 건물이기에 그날 그날 분위기가 다르다고. 그녀들이 없는 오늘은 영업 중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고요했다.
비가 내려 서늘한 날인데도 실내가 훈훈하다. 오가는 이들이 꽤 있나 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카페를 채웠다.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 다정한 연인, 효도 관광객. 적당한 간격을 두고 앉아서 각자의 시간을 즐긴다. 홀 중앙에 자리 잡은 동백꽃은 화려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곤 했다.
한쪽 벽에는 다양한 장르의 책이 빼곡하게 꽂혀있다. 별다른 질서는 없어 보인다. 마음껏 읽으라는 신호인가. 주인장의 귀차니즘 때문이라면 더욱 좋겠다. 여기에서는 냄비 받침으로 삼을 만한 두꺼운 책도 누군가에게 선택되었을까. 책장을 적당히 훑어보다가 한 권 꺼내 들었다. 가보지 못한 섬 이야기를 읽으며 다음 여행을 꿈꾼다.
소위 말하는 ‘생산적인’ 것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저 느리게 움직이며 숨을 고른다. 멋대로 흐르는 생각도 내버려 두었다. 이렇다 할 계획 없이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한없이 멈춰있어도 무엇하나 이상하지 않은 그 순간이 참 좋다.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
-장기하와 얼굴들, 느리게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