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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May 31. 2019

여행의 변수

부산 충렬사

도저히 일기예보를 의심할 수 없는 날이 있다. 대개 그런 날은 구름이 촘촘하기 때문에 언제쯤 태양이 얼굴을 내밀지 가늠하기보다 비바람이 몰아치지 않기만을 바랐다. 오랜만에 멀리 떠나온 오늘, 대차게 비를 맞을 생각까진 없는데 하루를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충렬사(忠烈祠)

부산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충렬사는 단순히 흘려들으면 절인가 싶지만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고위직뿐만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분들이나 여성 열사를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매년 오월이면 부산시민의 이름으로 제사를 지낼 만큼 시 차원에서 관리하는 문화재다.



표지판을 발견하고 망설였다. 갑자기 잦아든 빗줄기 때문이었다. 앞서 비바람에 공원 하나를 밀어냈는데 야외를 놓치긴 아쉬웠다. 언제 또 장대비가 쏟아질지 모른다. 방향을 틀어 들어선 사당 입구에는 궂은 날씨 때문인지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뒤편의 동래읍성으로 가는 산길을 개방하지 않는 시기라 더 그런 걸까. 올해의 제향 일정을 알리는 현수막이 외롭게 비를 맞고 있을 뿐 세상 고요하다.



애정의 깊이가 관리 상태로 드러나는 요즘, 지출 권한이 있는 후손들이 계속해서 마음을 듬뿍 담아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구석구석까지 매만진 느낌이 물씬 났다. 정갈하고 깔끔하다 못해 삐져나올 틈을 주지 않겠다는 관리인의 의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정성이 닿은 듯한 나무는 비를 맞아 그런지 색이 더 깊어 보였다. 금빛을 띄는 나무가 진짜 있구나. 잎사귀의 초록빛도 선명하다. 빗방울은 굴곡진 꽃잎이나 가는 풀잎을 가리지 않고 동그랗게 맺혀 있었다. 비 때문인지 모두들 생기가 넘쳐 보인다.



우산 때문에 높고 먼 곳을 바라보기가 힘들어 자꾸 낮은 곳으로 시선이 향한다. 골목 구석에 떨어진 꽃송이에도, 대문 옆에 아무렇게나 놓아둔 화분에 뿌리를 내린 잡초에도 눈길이 갔다. 왜 어렸을 때는 지금과 달리 작은 것들이 눈에 잘 들어왔던 걸까. 세상 모든 게 낯선 나이라 그렇겠지만, 키가 작아서 물리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궂은 날씨 덕분에 그때와 비슷해진 걸까.


지금을 살게 해 준 고마운 이들도, 늘 곁에 있는 작은 존재들도 잊고 지낸다. 이럴 때나 한 번씩 들여다보게 되는 이름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의 여행이란 마냥 모노일 것 같지만 역시 그렇지 않았다. 날씨는 정말 묘한 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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