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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Nov 28. 2017

관성의 여자

관성(慣性)은 물체에 작용하는 힘의 총합이 0일 때, 운동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말하며, 운동의 상태가 변할 때 물체의 저항력이다.


여자는 한번 나가면 집에 들어오기 싫고, 일단 집에 들어오면 밖에 나가기 싫다. 


'출근하기 싫다'거나, '사람 만나기 싫다'는 것이 아니라, 집에 있으면 계속해서 집에 있고 싶고, 나가 놀면 계속 놀고 싶고, 일이 잘 되면 쭉 일하고 싶고 같은,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특별한 자극이 없을 경우 '현재의 상태를 언제까지고 유지하고자 하는 성질'이 여자에게 있는 거다.


여자의 육체도 물체의 하나이고, 비록 가만히 간혹 몸을 뒤집을 뿐 움직이지 않는 것까지도 운동의 한 상태라고 본다면, 여자의 몸은 말 그대로 강력한 '관성'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물체다. 주말에 약속이 없을 경우, 항상 전날 밤에는 내일 어디도 가고 뭐도 해야지 마음속에 계획을 머금지만 다음날 눈을 뜨면 그 계획은 이른 아침 이파리에 맺힌 물방울 떨어지듯 어느새 머금은 계획은 또르르.



지난 주말, 이러저러한 계획들이 있었으나 금요일 퇴근해서부터 월요일 출근하기까지 여자는 한 발짝도 밖으로 내딛지 않았다. 한 번도 벗지 않은 웨어러블 스마트 기기 핏빗(fitbit)에 의하면, 토요일에는 총 17시간 36분을 잤고 일요일에는 15시간 56분 잤다. 주말 48시간 동안 총 33시간 32분을 잔 거다. 주말 이틀의 약 70%를 자면서 보냈다.


나머지 20%도 잠들지 않았을 뿐 누워 있었고, 나머지 10%는 아마 허기를 달래기 위해 이것저것 먹고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썼을 거다. 토요일에 343걸음 / 일요일에 164걸음을 걸었다. 일요일 약속이 친구의 몸살로 취소되었고, 다음날이 월요일이므로 일요일은 더욱 휴식이 중요하다는 심리적 방어막 때문에 더 적게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자는 주중에 일을 몰아서 하고, 주말엔 쉬거나 노는 일을 몰아서 한다. 잠도 주중엔 최소한만 자고, 주말에 몰아서 잔다. 무언가를 하면 다른 것도 계속하고 싶고 한번 몸과 마음을 누이고 나면 계속 쉬게 해주고 싶다.


지금 나이가 되기 전에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지 않으면 여자는 조금 불안했다. 그럴 땐 아픈 것이 좋았다. 아프다는 건 다 낫기 전까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공식적인 허가 같았다. 쉬어도 된다는 허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어도 된다는 허가.


지금 나이가 되기 전에는 연애를 하지 않고 있는 상태 역시, 자신의 감정이나 관계에 대한 목마름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끊임없이 할 일을 발굴하는 의무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불안을 안겨주었다. 연애 상대란 감정 상태를 관성에서 멀어지고 만들고, 유동성을 키우는 존재였으므로 그로부터 안도감을 느꼈다. 끊임없이 밖으로 불러내고, 안에 머물러도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게 하고, 꼭 해야 할 일이 없어도 뭔가를 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당시의 여자에게는 안정감을 주는 관계 방식의 하나였다.


꼭 연애가 아니라도, 더 어렸을 때의 여자는 친구 또한 규칙적으로 만났다. 대학 친구, 고등 동창, 중등 동창, 초등 동창, 동네 친구, 그리고 이런저런 활동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 관계와 물리적인 거리에 따라 일주일에 한 번은 봐야 하는 관계, 한 달에 한 번은 봐야 하는 관계, 분기에 한 번, 반기에 한 번, 일 년에 한 번은 봐야 하는 관계로 심리적/물리적 거리를 측정했다. 따라서 여자는 집에 머물 시간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최근, 헤르베르트 플뤼게의『아픔에 대하여』를 읽으며 여자는 깨달았다. 그때의 여자는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 본능적으로 두려웠구나.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없는 방에서 스스로와 독대하는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 큰 감정의 격동 없이 견딜 수 있게 되었구나.


여기까지 적고 보니, 또 합리화와 자기긍정에 능한 자아의 일부가 마주 보였지만 최소한 게으르고 나약하고 별 것 없는 스스로와 마주치는 일 자체에 자의로든 타의로든 계속해서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리 나쁜 일 같지 않다, 고 여자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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